봄빛 가득한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걸어보기~!

2013. 4. 30. 08:35세상 이야기

 

 

올해의 봄은 변덕쟁이에다 심술궂기까지 합니다.

난데없이 소나기를 뿌리고 지나가기도 하고, 하루는 추웠다가 또 다음 날은

초여름의 날씨를 느끼게도 합니다.

좀체 청명한 하늘도 보여주질 않더니 토요일 그나마 날씨가 개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꽃축제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등산 삼아 성곽을 따라 걷기도 하고 무엇보다 보수공사를 마친

연주봉 옹성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은 둘레가 약 12킬로에 달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남문에서 시작해서 연주봉 옹성을 지나 북문까지만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힘겹게 오르던 버스가 산성터널을 지난 뒤 우리를 내려줍니다.

남문을 향해 오르는데 줄지어 늘어 선 비석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대부분이 공덕비였는데,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푼 지방 관리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들이라고 합니다.

 

 

 

원래 이곳에 세워져 있던 19기의 비석과 산성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던

11기를 합쳐 총 30기의 비석을 한자리에 모아둔 것이라고 합니다.

 

 

 

비석군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산성의 남문이 보였습니다.

남한산성 4개의 성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심문이라고 합니다.

 

 

 

성문옆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도록 피어 있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이 남문을 통해 들어왔다고 합니다.

 

 

 

천천히 성벽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남한산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중에 있다고 하네요.

그 때문인지 보수공사가 진행중인 곳도 여러 곳 있었습니다.

 

 

 

봄은 성벽 위에도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성가퀴 위에서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는 뱀딸기꽃~

 

 

 

민들레도 피어 있고~

 

 

 

 

제비꽃도 피어 있었습니다.

 

 

 

 

길 옆에는 하얀 개별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더군요.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하얀 제비꽃도 만났습니다.

 

 

 

 

진달래도 한창이었습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1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 온 청태종의 청군을 맞아 47일간 항전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치욕적인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성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입니다.

 

 

 

성벽 바깥은 경사가 심한 비탈이어서 적군이 기어 올라와 성을 공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성을 둘러싼 계곡은 깊고 험해서 적군의 접근도 쉽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식량만 제대로 비축이 되어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항복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따뜻한 봄 날씨 때문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성곽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벽 주변은 아직 완전한 봄빛이 아니었습니다.

 

 

 

 

수어장대를 만났습니다.

산성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라고 합니다.

원래 이름은 서장대였는데 영조임금 때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2층으로

다시 지으면서 '수어장대'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네요.

 

 

 

장대의 뜻은, 장수가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臺)를

뜻한다고 하네요.

 

 

 

수어장대를 지나 다시 구불구불 이어진 성곽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등산에 재미를 붙인 그녀~

이제는 별로 힘들어 하지도 않고 씩씩하게 잘 걷는 편입니다.

 

 

 

깃발 놀이도 해 보고~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한강유역을 차지하거나 방어하기 위해서는 남한산성이 꼭 필요했을 것입니다.

 

 

 

노랗게 핀 개나리가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진달래도 이제 한창 꽃을 피우고 있더군요.

 

 

 

 

현재 남한산성은 국가 사적 57호로 지정되어 있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된 성벽을 1975년부터 1997년에 걸쳐 복원하였다고 하네요.

 

 

 

이제는 사람들에게 좋은 휴식처로 각광을 받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 모퉁이를 돌아 내려 가니 서문이 나타났습니다.

 

 

 

 

남한산성의 서문을 밖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이 서문 역시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인조임금이 이 문을 통과해서

항복하러 나간,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성문입니다.

 

 

 

청태종은 인조에게, 항복을 하러 나오는 주제에 성의 정문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조는 용포를 벗고 민갓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이 서문을 나섰다고 합니다. 밤에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항복을 하러가는

인조의 심정은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연주봉 옹성으로 향하는 성곽을 만났습니다.

 

 

 

 

연주봉 정상을 향해 길게 성곽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주봉 옹성이 나타났습니다.

 

 

 

 

옹성에 올라서니 하남시와 한강, 송파구 일대 그리고 멀리 덕소와

아차산까지 한눈에 들어오더군요.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와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는 성씨가 김(金)씨였다고 합니다.

씨족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한 신라인의 후예들로, 청 황실의 성씨였던 애신각라(愛新覺羅)는

만주어인 '아이신줘러'를 그대로 한문으로 표기한 것으로 원뜻은 '김씨 집안' 또는

'김씨 부락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아골타는 당시 고려를 선조들이 나온 부모의 나라라고 칭하면서 적대행위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금나라가 망한 뒤 몇 백 년이 지나 다시

만주 벌판을 지배하게 된 누루하치의 후손들은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었나 봅니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이 땅을 짓밟았으니 말입니다.

다만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뿐입니다.

 

 

 

우리의 최종목적지인 북문이 나타났습니다.

 

 

 

 

북문 앞에는 앵두꽃이 하얗게 흐드러지고 있더군요.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300여 명의 군사들이 북문을 빠져 나가 청군 진영을 기습했지만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만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남한산성에는 행궁도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어서 행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을 돌며 행궁을 바라 보았습니다.

 

 

 

인조임금의 한탄과 눈물이 어린 회한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어느덧 늦은 오후의 햇살이 산성 너머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신록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도 남기고...

 

 

 

그녀의 성화에 나도 잠시 모델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하얀 제비꽃 삼 형제~!

 

그렇게 역사의 현장인 남한산성을 다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