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임금의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에서~!

2019. 9. 24. 06:00여행 이야기

 

 

단종임금의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를 다녀왔습니다.

조선시대 역사 중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

단종 애사(哀史)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곳이다보니, 왠지

마음조차도 미리 숙연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청령포로 들어가는 선착장에 도착한 뒤 하늘을 바라보니

날씨조차도 곧 비를 뿌릴 것처럼 흐리기만 합니다.

 

 

 

 

 

 

 

 

선착장에서 바라본 청령포의 모습입니다.

청령포 앞을 흐르고 있는 강은 서강으로,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흡사 강으로 둘러싸인 섬처럼 느껴졌습니다.

 

 

 

강을 건너 숲으로 들어서니, 울창한 소나무 숲이

방문객을 먼저 반깁니다.

소나무 숲만 걸어도 마음이 편안해질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현재 청령포는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장소가 갖는 의미 외에도 울창한 소나무 숲과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는, 충분히 명승이 되고도 남을

곳이었습니다.

 

 

 

단종어소를 둘러보기전 잠시 소나무숲을 먼저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이제, 단종임금이 머물렀던 단종어소로 들어섰습니다.

먼저 입구에 있는 행랑채부터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행랑채는 단종의 시중을 들던 궁녀와 관노들이 기거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방안에는 그 당시 궁녀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인형이

놓여져 있더군요.

 

 

 

부엌엔 밥을 짓고 있는 궁녀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행랑채 앞 작은 장독대의 모습입니다.

독 위에는 관광객들이 쌓아둔 작은 돌탑들이 가득하더군요.

 

 

 

담장 너머로 단종어소가 보였습니다.

 

 

 

 

 

 

 

 

 

 

단종어소의 모습입니다.

유배 당시 단종이 머물렀던 어소를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소 앞에는 비각이 있더군요.

'단종유지비각'으로, 비석엔 영조임금의 친필로 이곳이

단종이 머물렀던 옛터임을 밝히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단종어소 앞에는 담장을 타고 넘어온 특이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더군요.

 

 

 

흡사, 단종어소를 향해 몸을 굽혀 절을 올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소나무가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자랐는 지는 모를 일이지만

신기한 모습임에는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단종임금이 이곳 청령포에 머문 기간은 두 달 남짓이라고 합니다.

유배된 뒤, 그 해 여름에 큰 홍수가 나면서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거처를 영월 동헌에 있던 관풍헌이란 객사로 옮겼다고 합니다.

 

 

 

 

 

 

조선의 6대 왕인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게 됩니다.

 

 

 

 

 

그 후, 성삼문 박팽년 등을 비롯한 사육신들이 일으킨 복위 사건 이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이곳, 청령포로 유배됩니다.

당시로는 한양 도성에서 이곳 청령포까지 다다르는 길이 결코

만만치 않은 머나먼 길이었을 것입니다.

겨우 17세였던 어린 왕에겐 감당키 어려운 고난과 고통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단종임금에겐 숙부이자

세조에겐 동생인 금성대군이 다시 복위운동을 일으키다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단종임금 역시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커다란 소나무는 '관음송'이라 불리는 소나무로

단종 유배 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라고 합니다.

수령은 약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고 현재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당시,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 사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도 있으며, 관음송이란 이름은

단종의 유배 당시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는 뜻의

관(觀),때로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뜻의 음(音)을 써서

관음송이라 불리운다고 합니다.

 

 

 

관음송을 지나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가다가 만난

망향탑입니다.

단종이 한양을 그리워하며 주변의 돌을 모아 쌓은 탑이라고 합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서강의 모습입니다.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뒷편은 사람이 오르기

어려울만큼의 험준한 산세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야말로 육지 속의 섬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습니다.

 

 

 

노산대의 모습입니다.

서강 너머의 풍경이 훤히 바라보이는 곳으로, 단종임금이

저녁 무렵이면 이 바위 위에 올라 석양과 함께 시름에 잠겼던

곳이라고 합니다.

 

 

 

노산대를 내려오니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 옵니다.

금표비였습니다.

 

 

 

비석 뒷편엔 '청령포금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은 단종임금이 유배되어 있던 곳이므로 일반 백성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뜻이라고 하며, 영조임금 때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청령포는 단종어소에서 사방 어디를 걸어도 채 100보가 되지

않을 만큼 좁은 곳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작은 섬에 갇힌 것이나 다름 없었을 이곳이 단종임금에겐

한없이 답답하고 또 외로운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속에 갇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무척이나 두려웠을 것입니다.

 

 

 

 

 

 

 

 

 

청령포를 둘러보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도 듭니다.

만약, 사육신이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역사의 순리에

순응하고 살았더라면, 단종은 상왕으로서 어쩌면 무난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굳이 이 머나먼 청령포까지 유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금성대군 역시 또 다시 복위 사건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단종임금이 유배지를 벗어나긴 힘들었을지 모르나 죽음이

그렇게 빨리 찾아오진 않았을 것입니다.

금성대군의 복위 사건이 결국 단종임금의 죽음을 앞당긴 가장

큰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연이은 복위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동생 마저 죽음에

이르게 했던 세조의 입장에서는 결국 그 화근인 단종을 죽임으로서

더 이상의 피를 보려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은 충신으로 추앙 받고 있지만, 그 비극의 몫은 고스란히

단종임금이 떠안게 된 것이었습니다.

 

 

 

단종임금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궁중에 어른들이 아무도 없었던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처지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어머니인 대비도 왕비도 없이 의지할 곳 하나 없던 12살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아마 어머니인 대비나 할머니인 왕대비라도 살아 있었다면

단종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부왕이었던 문종의 고명(임금이 신하에게 남기는 유언)을 받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신권(臣權)이 득세를 하고 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수양대군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린 단종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구중궁궐의 높은 담장 안에서 밤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눈물을 삼켰을 것입니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세조 역시 바꾸어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절박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조선이 개국하고 왕은 5대를 거쳐갔지만 역사는 겨우 60년

남짓이었고 아직 완전히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고 볼 수 없는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올라 신하들에게

권력을 휘둘리고 있었으니, 왕족으로서 이러다가 나라마저 신하들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함께, 자신의 목숨조차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불안감과 두려움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결국

왕위찬탈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삼국지의 내용을 빌자면, 유비는 숨을 거두면서 제갈공명에게

아들 유선을 잘 보필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충격적인 당부를 덧붙입니다.

혹 유선이 황제의 자질이 부족하거든 제갈공명 스스로가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려 줄 것을 당부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놀라움에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못난 아들의 황위를 지키기 위해 유비가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마지막 계책이었을 것입니다.

혹 일어날지도 모를 공명의 역심을 먼저 얘기를 꺼냄으로서

미리 차단한 것일테니까요.

 

 

 

 

 

어쩌면 문종임금도, 김종서가 아니라 당시 가장 왕권을

위협할 인물로 보였을 수양대군을 불러 유비가 공명에게 당부하듯

단종임금을 부탁했더라면, 계유정난이나 왕위 찬탈 같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문종임금이 수양대군을 믿지 못하면서 이미 비극은 시작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청령포를 둘러보는 동안 이런저런 감회가 마음 깊숙히

스며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청령포를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