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가본 덕혜옹주 묘소와 의친왕 묘소, 그리고 홍릉에서~!

2016. 9. 26. 17:12세상 이야기

 

 

얼마 전 덕혜옹주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었습니다.

비록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그동안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던 덕혜옹주와 의친왕의 묘소를

11월 말까지 공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았습니다.

약 3년 전에 덕혜옹주 묘소를 찾아 울타리 너머로만

바라보고 온 적이 있었던터라, 사뭇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덕혜옹주 묘소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덕혜옹주 묘소로 향하는 길은 고종과 순종의 능인 홍유릉 입구에서

반대편으로 이어지는 황톳길로, 평소엔 주변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산책길이나 운동을 즐기는 장소로 애용되고 있는 길입니다.

 

 

 

그 황톳길을 따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의 무덤인

'영원'을 지나면 약 200여 미터 거리에서 덕혜옹주의 무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덕혜옹주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길을 따라 설치되어 있는 철제 울타리에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수많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더군요.

조선 왕들의 능과 가계도, 그리고 덕혜옹주와 의친왕의 옛 모습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전시되어 있는 덕혜옹주의 사진을 몇 장 담아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덕혜옹주의 묘소가 눈에 들어 옵니다.

 

 

 

 

'대한덕혜옹주지묘'라고 쓰여진 비석의 글씨가 또렷하더군요.

한때, 덕혜옹주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던 곳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세간의 관심이 멀어져 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무덤의 규모나 모습은, 역사적 상징성만 아니라면 여느 일반인의

무덤과 다를 바 없어 보였습니다.

다만, 무덤을 감싸고 있는 잘 정돈된 푸른 잔디가 차분한 느낌을 줄 뿐이었습니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이 되던 해에 태어난 고명딸이라고 합니다.

늦게 얻은 딸이어서 고종이 애지중지 옹주를 키웠다고 합니다.

그녀의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아마 이때가 전부였을 것입니다.

고종이 승하하셨을 때 옹주의 나이는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이후로

일제에 의해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의 부끄럽고도 수치스러웠던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황녀라는 신분만으로 꽃다운 시절과 인생을 송두리째 앗겨버린 덕혜옹주...

그녀를 추모하는 마음을 비석 위에 내려놓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제는 편히 주무시길......!!

 

 

의친왕의 묘소는 덕혜옹주 묘소와 그리 멀지 않은 지척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비록 어머니가 다르긴 하지만 같은 아버지를 둔

남매이기도 합니다.

 

 

울타리에 전시되어 있는 의친왕의 모습도 몇 장 담아 왔습니다.

 

 

 

 

 

 

 

 

 

 

 

 

 

 

 

 

 

 

 

 

 

 

 

 

 

의친왕의 묘소입니다.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 '이석'의 아버지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왕'이라는 칭호까지 부여 받았던

의친왕이었지만, 무덤은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덕혜옹주의 무덤엔 비석이라도 서있었지만 의친왕의 무덤엔 비석조차도

보이질 않더군요.

 

 

 

생전에 스무 명이 넘는 많은 자식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요즘 들어 그의 행적들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으며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했다가

발각되어 실패한 뒤 부터는 일제의 감시에 시달렸고, 독립운동가들과도

꾸준히 교류했던 흔적들이 차츰 드러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으로의 강제 유학을 끈질기게 종용받았지만 다른 왕자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거절하고 버티며 이 땅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망국의 왕자였지만 끝까지 그 품위와 기개를 잃지 않았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의친왕께서도 이제 모든 시름 내려 놓으시고 편히 잠드시길 바랍니다......!

 

 

돌아나오는 길에 역시 개방된지 얼마 되지 않은

'영원'도 돌아보기로 합니다.

'영원'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그의 부인이었던

이방자 여사의 무덤입니다.

 

 

영친왕은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순종임금에겐 이복 동생이 됩니다.

순종이 후사가 없었던 까닭에 동생이 보위를 이을 황태자로 책봉된

것이라고 합니다.

 

 

 

영원의 재실입니다.

영친왕의 무덤이 릉으로 불리지 않고 원으로 불리는 까닭은,

조선 시대엔 왕실의 무덤을 부르는 호칭이 달랐다고 합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나 그 비의 무덤을

원(園)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황태자 자리에만 머물렀던 영친왕의

묘소엔 '능'이라는 호칭이 아닌 '원'이라는 호칭이 붙은 듯 합니다.

 

 

 

영원의 정자각입니다.

다른 왕릉에 비해선 규모가 작은 편이었습니다.

 

 

 

영원의 모습입니다.

처음보면서 느낀 점은, 비록 석물들의 규모가 왕릉에 미치진 못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로 보면 거의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여서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아버지였던 고종임금의 무덤인

홍유릉으로 향했습니다.

홍유릉은 같은 능역 안에 있는 고종임금의 능인 홍릉과

순종임금의 능인 유릉을 동시에 일컫는 명칭으로, 홍릉만

둘러보기로 합니다.

 

 

홍릉에 있는 재실입니다.

 

 

 

 

홍살문 너머로 홍릉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홍릉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능의 규모와 석물의 종류나 위치가

조선의 다른 왕릉들과 확연히 차이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왕릉에서는 석물이 무덤 앞을 지키고 서있는 것에 반해

홍릉에서는 침전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었습니다.

 

 

 

이렇게 능의 모습이 다른 것은 고종임금이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왕릉도 황제릉으로

조영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능을 본 떠 조영하였다고 하였는데, 다른 왕릉에서는

침전도 제후국의 격식을 갖춰 정자각으로 지어져 있지만 홍.유릉에선

일자각 형태의 침전이 세워져 있는 것 또한 특징이었습니다.

 

 

 

홍릉 앞에 줄지어 서있는 석물들의 모습입니다.

동물 석상은,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서대로

서있다고 하네요.

 

 

 

비교적 근대에 조성된 왕릉이다보니 석물들의 모양이나 문양이

아직도 정교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살아서 뛰어 다닐 것 처럼 생생해 보이기 까지 합니다.


 

 

 

 

 

 

 

 

 

 

 

 

 

 

 

 

 

 

 

 

 

 

 

고종임금의 능인 홍릉의 모습입니다.

현재 조선의 왕릉은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 흥릉 역시 멀리서 바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열두살에 왕위에 올라 재위 기간동안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 간의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왕노릇 하기가

힘들었을 유약한 임금이었던 고종은, 그러나 밀려드는 외세의

침략속에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 어느 임금보다도

힘들고 괴로운, 격랑의 재위 기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만약 역사가 그에게 망국의 책임을 묻는 굴레를 씌운다면 아마, 그 역시도

억울함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 흘러간 역사는 다만 그 교훈으로만 삼을 일일 것입니다......!

 

 

 

 

 

 

 

 

 

 

홍릉을 지키고 서있는 무인석의 모습을 찍어 봅니다.

 

 

 

 

전체적인 입체감은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었지만, 갑옷의 무늬가

굉장히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문인석의 모습입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합니다.

덕혜옹주의 일생을 한 여인의 인생사라고 치부하기엔

그 인생사에 덧붙여진 역사의 굴레와 부피가 너무 커 보입니다.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놓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교훈이자, 책임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게, 홍릉과 덕혜옹주의 묘소를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