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그 영욕의 세월과 함께한 운현궁을 돌아보고...!

2015. 2. 21. 08:33박물관.문화재

 

 

 

흥선대원군의 집이었던 '운현궁'을 다녀왔습니다.

북촌을 찾아가던 중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주변 지도를 탐색하다가

4번 출구 가까운 곳에 운현궁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장 발길을 옮겼습니다.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하기 전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잠저

곧, 태어나고 자랐던 생가가 되는 곳입니다.

잠저(潛邸)는, 예전에 왕으로 등극하기 전 살았던 집을 일컫는 말입니다.

고종이 즉위 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4번 출구를 올라서니 드문드문 눈발이 날립니다.

몇 걸음을 옮기니 곧 운현궁의 긴 담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입장료는 무료였으며, 대문을 들어서니 넓은 마당 너머로 운현궁의

기와지붕이 바라 보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꽃담이었습니다.

갖가지 문양으로 아로 새겨진 이 꽃담은 경복궁의 자경전에서 눈에 익숙하던

것이었습니다. 꽃담에 새겨진 한자들은 모두 집 주인의 만수무강과 복을

염원하는 글자들이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노안당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였으며,

쇄국정치의 산실이기도 한 곳입니다.

 

 

 

노안당의 모습입니다.

노안의 뜻은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전체적인 건축 기법으로 볼때 궁궐에 버금가는 품격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노안당의 열려있는 문 사이로 난을 치고 있는 흥선대원군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난(蘭) 그림의 대가였다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글과 그림을 배웠는데 추사는 그의

묵란(墨蘭)을 가리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방에는 청도포를 입고 앉아있는 열두 살 어린 고종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철종이 승하 후, 대왕대비였던 조대비는 교지를 내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었던 명복에게 대통을 잇게 합니다.

방 안에는 그 당시 고종을 모시러 왔던 상황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었습니다.

 

 

 

고종의 앞에는 벼슬아치들의 관복인 흑단령을 입고 앉아있는

흥선대원군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조대비의 교지를 받들고 왔던 영의정 김좌근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김좌근은 당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붉은 조복을

입고 고종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부터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자

파락호 행세를 하며 기회를 노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 역사 속의

전설같은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종이 즉위 후 흥선대원군은 임금의 아버지로서 조선 역사상 최초로

'살아있는' '대원군'이 됩니다.

 

 

 

무려 10년에 걸친 섭정 기간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 짜던 서원의 철폐와 수많은 개혁정치를 펼쳤지만

그러나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지나친 쇄국정치, 아들 고종과의 오랜

권력다툼으로 인한 정책의 폐해도 만만찮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원본 이미지:블로그 '김규봉...사는 이야기'에서 발췌)

 

 

 

노안당 건물 뒷편의 모습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이곳 운현궁에서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면서 영욕의 세월을

보내다가, 1898년 2월 일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노안당 앞에는 흥선대원군의 시중을 들던 수하들이 머물던 행랑채가

있었는데, 그 방안에 놓여져 있는 인형입니다.

대원군의 수하들은 네 명으로 '천하장안'으로 불렸는데 각각의 성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이 인형은 그 네 명 중 '천희연'의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대원군의 경호는 물론 정보를 수집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노안당을 지나 운현궁의 안채인 '노락당'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노안당과 같은 해에 지어진 건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가례를 올렸다고 합니다.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흥선대원군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며, 대원군이 고종의 왕비를 책봉할 때에 외척의

정치적 간섭을 막고자 일찍 아버지를 여윈 자신의 11촌 친척 아저씨뻘이 되는

민치록의 딸(훗날 명성황후)을 왕비로 천거하였다고 합니다.

 

 

 

노락당의 방안에는 명성황후가 부대부인의 생신을 축하하러온 장면을

재현해 놓은 인형들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빛깔 고운 당의를 입고 앉아 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입니다.

 

 

 

부대부인의 모습과 부대부인의 무릎에 앉아 있는 세자(순조), 그리고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의 모습입니다.

 

 

 

다른 방에는 운현궁 보수 공사 당시 낙성식을 축하하러 방문한 조대비의

인형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다과를 들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앞에는 함께 참석한 철종임금의 왕비였던 철인왕후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닫이 문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부대부인의 모습입니다.

 

 

 

대원군과 영욕의 세월을 고스란히 함께 보냈던 부대부인은 1898년 1월

대원군보다 한 달 먼저 여든한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만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원군의 영욕의 세월을 묵묵히 함께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명성황후의 모습을 다시 찍어 봤습니다.

남편인 고종을 위해서 흥선대원군과 권력투쟁을 벌이기도 했던 여인...

비록 자신의 척족을 기용한 탓에 세도정치의 부활로 임오군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외세의 침략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조선을 지키려 애쓰다가, 결국 을미사변 당시 참혹하게

살해 당하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부대부인의 생신에 참석했을 때만 해도 자신의 끔찍한 훗날을 결코

예견하지 못한... 즐겁고 평온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노락당 뒷뜰로 통하는 작은 솟을대문입니다.

아낙네들의 공간인 안채를 위해 만들어진 또다른 배려처럼 여겨지는

대문이었습니다.

 

 

 

솟을대문을 지나서 바라본 운현궁의 뜰입니다.

 

 

 

이로당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이로(二老)의 두 노인은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된다고 합니다.

 

 

 

이로당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자 형태를 띤 건물이라고 합니다.

앞의 건물들에 비해 늦게 지어진 건물이라고 하며, 그 나름의 품위를 갖춘

멋진 건물이었습니다.

 

 

 

이로당의 방안에 설치되어 있는 여덟 폭 병풍입니다.

화려한 모란꽃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즉위 후, 약 10년에 걸친 섭정을 펼칩니다.

그러나 고종의 나이 21세 되던 해에 최익현의 상소로 인한 탄핵을 받아

고종으로 부터 권력의 자리에서 축출되고 맙니다.

 

 

 

어쩌면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내세워 스스로 왕의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원래 섭정이란 어린 왕이 성인이 되어 스스로

친정할 수 있는 나이와 능력이 되면 섭정을 그만 두는 것이 관례인 것에 반해

대원군은 고종의 나이 21세가 되도록 권력을 놓지 않았으니, 어쩌면

아들인 고종의 능력을 믿지 못했거나 여전히 권력욕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일 것입니다.

 

 

 

권력에서 물러난 뒤 흥선대원군은 9년 뒤에 임오군란으로 인해

다시 권력의 전면에 재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청나라에 의해 납치된 뒤 3년동안이나 청나라에

억류되는 수모를 겪고 맙니다. 아마도 청나라의 협조속에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조선이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을 시에 그동안 추진해온

모든 정책이 물거품이 될 것을 우려한 청나라의 도발이었던 것으로

추측을 한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대원군은 다시는 권력의 중심에

나서지 못하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게 됩니다.

더군다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유명한 을미사변의 배후였다는 누명과 함께

운현궁에 유폐되는 수모를 겪기도 합니다.

 

 

 

이로당의 뒷뜰에 놓여있는 절구통과 우물입니다.

운현궁은 이렇게 흥선대원군의 영광과 굴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며,

조선 후기 격동적인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서 묵묵히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원래 운현궁은 꽤 넓은 터와 더 많은 건물을 품고 있던 곳이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상당 부분이 팔리고 지금의 규모가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로당 뒷편의 영로당은 운현궁의 별채였으나 지금은 '김승현가(家)'라는

이름으로 시도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따로 관리되고 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죽은 후 7일 장을 치렀지만 고종은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결국 장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버린 것이었습니다.

 

 

 

오랜 권력 다툼과 정치적 반목으로 인해 이미 부자(父子)의 정(情) 마저

사라져 버린 뒤였나 봅니다.

더군다나 대원군이 손자 이준용을 옹립할 목적으로 몇 차례 고종의 폐위를

기도하기도 했을 정도이니, 이미 고종과 대원군의 사이는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대원군과 고종은 뜻하는 바가 서로 달랐다고 합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조선이 독자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룬 뒤에 당당히 외세와 맞선다는 뜻이었다면, 고종은 개화를 통한 외세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 들이는 것이 조선을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고

또한 조선을 발전 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쇠퇴해 가던 나라를 일으키고 싶은 바램은 간절했을

것입니다. 권력보다 더 절실했던 염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책의 충돌로 인한 혼돈이 결국 외세의 침략을 부채질하고

그 침략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권력은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이 왕이 된 자신의 아들을 믿고 그 아들을 위해 과감히 권력을

포기할 줄 알았더라면, 역사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버지 대원군과 왕비였던 명성황후의 틈바구니에서 결코 나약한 왕 노릇에만

그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유물전시관에 재현해 놓은 명성황후의 모습입니다.

 

 

 

황후의 복장과 격식을 갖춘 위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돌아나오는 길에 운현궁의 꽃담을 다시 한 번 찍어 보았습니다.

 

 

 

작은 꽃무늬가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담장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아름다운 꽃담장 너머에서 흥선대원군은 꽃처럼 아름다운

운현궁의 봄을 오래토록 염원했을 지도 모릅니다.

 

 

 

노안당의 대문에 걸려있는 손잡이입니다.

저 손잡이를 잡아 당겨 대문을 열었을 흥선대원군은 한때나마 우리 역사의

중심에서 육중한 대문을 열어 젖혔던 풍운아였습니다.

스스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싶었던 야심가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 되고 싶었으나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역사의 뒷편으로

쓸쓸히 사라져 버린 비운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운현궁의 뜰에는 채 피우지 못한 대원군의 꿈과 한숨, 그리고 눈물이

켜켜히 쌓여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운현궁을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