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의 왕비, 단경왕후의 무덤... 온릉에서~!

2020. 10. 4. 07:00박물관.문화재

 

몇 년 전

KBS2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7일의 왕비'의

드라마 속 주인공이었던, '단경왕후 신씨'의 무덤인

온릉(溫陵)을 다녀왔습니다.

 

단경왕후 신씨는 조선 제 11대 임금인 중종임금의

첫 번째 왕비로,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된 뒤

중종임금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가 되었던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신수근이 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뒤, 역적의 딸로 몰리면서 결국 7일 만에

왕비의 자리에서 쫒겨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쫒겨난 후 매일 경복궁이 잘 내려다보이는 인왕산에 올라

다홍치마를 펼쳐놓고 중종임금을 그리워 했다는,

인왕산 치마바위의 야사를 만들어낸 여인이기도 합니다.

 

그후, 사가(私家)에서 머물다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약 200년의 세월이 더 흐른 영조임금 대에 이르러서야

왕비로 복원된 뒤,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고 무덤 역시

온릉으로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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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릉으로 들어서니 조선시대의 다른 능에 비해

비교적 소박하고 규모가 커보이지 않는 온릉의 모습이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바라보였습니다.

 

 

 

정자각과 함께 바라본 온릉의 모습입니다.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누이를 연산군에게

시집보내고, 또 딸을 당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며

훗날 중종임금이 되는 진성대군에서 시집보낸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당시엔 좌의정이란 높은 벼슬에

올라 있었는데, 진성대군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 했던

반정세력에게는 그의 장인이었던 신수근의 동참 역시

꼭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반정세력 중 한 명이었던 우의정 강귀손이

신수근을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누이와 딸 중 누구에게 더 정이 가는가?>

그러자 신수근은 단호하게 대답하기를,

<지금의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는 영명하니 다만

그를 믿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반정에 참가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으로

연산군의 치세가 비록 포악하고 험악하나 세자는 총명하니

세자가 보위를 이어받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므로

자신은 현재의 임금을 계속 섬기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결국 신수근은 반정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의 형제들 역시 함께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만약 동참을 했더라면 딸이 왕비의 자리에서 쫒겨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며 자신 역시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렸을 터이지만, 한 번 섬긴 임금을 결코 배반하지 않겠다는

꼿꼿한 정신을 드러낸 것으로, 훗날 단경왕후의 복위와 함께

신수근 역시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는데, 영조임금은

<그의 충성과 의리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에 못지 않다.>

하며 치하하였다고 합니다.

 

 

 

비각과 온릉의 모습입니다.

 

 

 

주춧돌만 남아있는 이 시설은 아마도 수복방이나

수라간 건물이 있었던 터로 추정이 됩니다.

수복방은 제사를 지내러 온 제관이 대기하거나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 또는 능을 관리하는 사람이 임시로

머물기도 하는 건물로 쓰였다고 하며, 수라간은

제사 음식을 준비하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조선왕릉 구조도를 참조해보니 위치가 수복방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온릉의 전체 전경입니다.

홍살문과 정자각, 온릉이 나란히 놓여져 있는 형태입니다.

숲이 온릉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

바라보는 동안 왠지 마음마저 포근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온릉을 가까이 찍어본 모습입니다.

온릉의 모습이 다른 능에 비해 소박하고 단촐해 보이는 것은

복원된 왕비의 능이기 때문에, 병풍석과 난간석, 그리고

무인석을 생략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문인석만 보이고 그 옆에 우뚝 서있어야 할

무인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과 호랑이의 석상도 원래는 두 쌍씩 세우지만

한 쌍으로 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온릉을 다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