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에서 만난... 김영랑 시인의 생가 <영랑생가>에서~!

2021. 3. 27. 06:30여행 이야기

 

시인 김영랑 선생의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생가는 강진군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더군요.
강진 읍내를 지나며 이정표를 따라 들어간 곳엔
울창한 대나무 숲을 울타리 삼아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집 몇 채가 보였습니다.

 

생가 앞에는 시문학파기념관도 자리잡고 있더군요.
실내는 둘러보지 않고 정원에 세워져 있는 동상만 카메라에
담아 보았습니다.

 

 

동상의 주인공들은, 1930년 3월 순수 문학지인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던 세 시인들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앞줄에 앉아 있는 두 시인 중, 왼쪽이 김영랑 시인이며
오른쪽이 박용철 시인, 그리고 정지용 시인이 뒤에 서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김영랑 시인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겐 김영랑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영랑은 호이며,
본명은 김윤식이라고 합니다.

 

 

'향수'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정지용 시인의 모습입니다.

 

 

박용철 시인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주도했던 시문학은 정치성이나 사상성을 배제하고,
오로지 순수 서정시 만을 지향하여 이 땅에 순수문학을
뿌리내리게한 모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동상은 실물 크기에 얼굴 표정이나 옷의 표현 또한 사실적이고 세밀해서,
정말 세 시인이 시간을 거스르고 정원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듯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동상의 맞은 편에 세워져 있는 시문학 제1호의 책 표지 모형입니다.

 

 

그리고, 시문학에 참여했던 시인의 모습들도 새겨져 있었습니다.
뒷줄 왼쪽부터, 이하윤. 박용철. 정지용
앞줄 왼쪽부터,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의 모습입니다.

 

 

이제 생가 마당으로 들어 섰습니다.
아침 9시 무렵의 비교적 이른 시간이라 생가를 찾아온
다른 방문객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더군요.

 

 

입구의 돌담 아래엔 팬지꽃과 시비(詩碑) 하나가
가장 먼저 방문객을 반기고 있었습니다.

 

 

행랑채 앞에도 시비가 놓여져 있더군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시인의 대표작이나 다름없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시가 적혀 있더군요.

 

 

행랑채를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니 안채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전형적인 옛 시골집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지붕 위로는 매화꽃이 한창이었습니다.

 

 

안채 앞에는 장독대가 자리잡고 있더군요.
그 장독대 한켠엔 '오─매 단풍 들것네'란 시의 시비가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장독대와 안채 사이의 샛마당과 뒷마당엔
동백의 낙화가 한창이었습니다.
아직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떨어진 모습 그대로
놓여져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광경에 정신을 앗겨 한참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 중, 가장 말끔하고 이쁜 세송이의 낙화를 골라
이렇게 인증샷을 남겨 봤습니다.

 

 

영랑생가는, 시인이 1948년 서울로 이사한 후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던 것을 1985년 12월 강진군이 매입하였고
1986년 전라남도 지정문화재를 거쳐 2007년 10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다고 합니다.
생가는 행랑채만 새로 복원한 것일 뿐, 안채와 사랑채는
몇 군데 손질하는 것으로 그쳤을 정도라고 하니, 현재의 모습은
시인이 살았던 그때의 모습과 크게 다를바 없다고 합니다.

 

 

생가 뒷편으로는 여러 그루의 꽤 큰 동백나무가 있었는데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무성한 대나무숲과 동백나무가 어우러지듯 울타리를
만들며 생가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꽤 넓어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신경림 시인의 책 <시인을 찾아서>의 내용을 빌자면,
시인의 시는 대부분 이 사랑방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하며
마음이 넉넉하고 손이 컸던 시인의 성격탓에 사랑방에는
늘 문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끔 이곳으로 소리꾼들을 불러 소리판을 벌이기도 했다고 하니,
아마도 풍류를 꽤 즐겼던 성격으로 추측을 한다고 합니다.

 

 

생가를 빠져나와 담장 밖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이렇게, '영랑생가'를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