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강진, 다산초당에서~!

2021. 3. 28. 07:00여행 이야기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을 다녀왔습니다.
햇살은 따뜻했고 눈길 닿는 곳 마다 동백꽃이 흐드러지도록 피어 있던
그런 봄날이었습니다.
이정표를 따라 꼬불꼬불한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니 산 아래 그리 넓지 않은
주차장이 나타났습니다.
차를 세우고 이정표를 따라 다산초당을 향해 발길을 옮겼습니다.

 

다산초당을 향해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울퉁불퉁한 산길이었습니다.

 

 

주차장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약 300m의 거리라고 하더군요.
모처럼, 역사적인 장소를 향해 숲길을 걸어보는 것도 또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다산초당의 유명한, 나무 뿌리가 드러나있는 길입니다.
이 길은 정호승 시인의 시(詩), '뿌리의 길'에 의해 더 유명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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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뿌리의 길'...(정호승)

 

 

다산초당을 향해 오르는 산길 주변에 문득 무덤 하나가 나타나더군요.

 

 

안내판을 보니, 다신의 18제자 중 한 명인 윤종신 선생의 묘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리고,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다산초당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산초당의 모습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강진으로 유배된 뒤 약 7년 간은
주막과 제자의 집 등을 전전하며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다 1808년 봄, 외가 집안이었던 해남 윤씨의 산정(山亭)인
이곳에 들렀다가 조용하고 아늑하며 경치 좋고, 또한
어느 정도는 세상과 단절된 곳이기도 했던 이곳이
선생의 마음을 무척 끌었던가 봅니다.
선생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흔쾌히 머물기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다산이 이곳에 머문 기간은 약 11년이라고 합니다.
비로소 안정된 거처를 마련한 다산은 이곳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고 저술활동에 매진하면서 수많은 저서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다산초당의 모습입니다.
초당 주변은 유난히 동백나무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다산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연못도 넓히고
가운데에 석가산도 쌓고 잉어를 키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연못엔 '연지석가산'이란 안내판이 놓여져 있더군요.
다산은 키우던 잉어를 꽤 귀하게 여길만큼 애착이 많았던지
유배가 풀려난 뒤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잉어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초당 앞에 걸려있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초당 안에 놓여져 있는 선생의 초상화입니다.

 

 

마당에는 크고 넓직한 돌 하나가 놓여져 있더군요.

 

 

'다조'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이 돌은 선생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것으로,
차를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였던 돌이라고 합니다.
선생은 이 돌 위에서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차를 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소 친하게 지냈던 혜장선사와 초의선사와 함께
이 돌 주변에 둘러앉아 차를 달여 마시기도 했을 것입니다.

 

 

초당 옆 작은 개울에는 동백꽃의 낙화가 떨어져 있더군요.

 

 

 

 

 

 

 

 

초당 옆 산길을 오르니, 바위에 새겨진 정석(丁石)이라는 글씨가 보였습니다.

 

 

다산이 직접 새긴 글씨로 전해진다고 합니다.

 

 

초당 옆을 지나 산길을 오르니, 또다른 작은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동암 또는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선생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이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1976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동암을 지나니 오솔길이 나타나더군요.
다산초당에서 동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라고 하더군요.

 

 

유배생활 동안 선생의 가장 소중한 벗이었던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이 오솔길을 오가며 서로 정을 나누었던 길이라고 합니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혜장선사는 수시로 이 오솔길을 걸어와 선생과
차를 마시며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나누어 마셨다고 합니다.
길고 길었던 유배생활에서 혜장선사는 선생에게 유일한 벗이었고
청량제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오솔길 주변에 세워져 있는 이 정자는 '천일각'이란 이름이 붙어 있더군요.
선생이 머물던 시절에는 없었던 정자로, 아마도 선생이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로 함께 유배길에 오른 형님이신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산기슭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을 것이란 생각에,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다산초당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초당을 떠나왔습니다.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지만, 시대에 의해 희생된 안타까운 천재 학자의
발자취가 초당 곳곳에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돌계단 위에 무심히 동백꽃 낙화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산초당을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