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 완도 청해진유적지에서~!

2021. 3. 30. 07:00여행 이야기

 

해상왕 장보고의 자취가 남아있는 완도의 청해진유적지를 다녀왔습니다.
청해진은 이미 잘 알려진바와 같이, 장보고에 의해 당나라의 해적활동을

근절 시킬 목적으로 완도에 설치했던 군사기지였으며, 장보고는 이 청해진을 근거지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해적소탕은 물론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하기도 했던,

말 그대로 바다를 주름잡던 해상왕국에 가까운 군사기지였다고 합니다.

당시 청해진에는 약 1만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장보고가 신라의

왕위계승전에 뛰어 들었다가 암살을 당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당당히 바다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이자 유서 깊은 유적지였습니다.
그 청해진유적지를 천천히 돌아 보았습니다.



완도읍에서 청해진유적지로 향해 가는 길, 가까운 언덕 위로

커다란 동상 하나가 늠름하게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완도 '장보고 어린이놀이공원'에 세워져 있는 동상으로 잠시 길가에 차를 세우고

그 모습을 찍어 봤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리를 건너 유적지에 들어서니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유적지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만나는 외성문의 모습입니다.
바깥 성문이란 뜻으로 청해진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습니다.

 

 

 

외성문 앞에는 성벽에 둘러싸인 우물이 보였습니다.
우물의 규모가 꽤 큰편이라고 합니다.

 

 

 

외성문을 지나온 뒤 되돌아 본 풍경입니다.
청해진 유적이 있는 섬은 장도라 불리는 섬으로 육지와는 약 150m 정도

떨어져 있는 섬이었습니다.
수차례의 발굴작업을 통해 청해진의 본진이 있었던 곳으로 추측을 한다고 하며,

그후 복원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외성문을 지나면 만나는 내성문의 모습입니다.
외성문이 성의 입구 역할을 했다면 내성문은 청해진의 본진을 실질적으로

방어하던 중요한 성문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더군요.

 

 

 

내성문과 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대(高臺)의 모습입니다.

 

 

 

청해진에 들어서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멀리서 섬을 바라볼 때엔 섬의 규모가

그리 크지않게 느껴졌는데 막상 외성문을 통해 들어와보니 섬의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섬 전체가 가파르면서도 높은 토성으로 둘러쳐져 있다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정도 규모의 토성을 쌓고 군사시설을 갖출 정도였다면 청해진의 군사력이나

규모가 생각보다 꽤 방대했을 것이란 짐작이 들 정도였습니다.

 

 

 

토성의 치성 너머로 바라본 주변의 풍경입니다.
아마 청해진 당시에는 이 치성 위에도 망루 성격의 누각이 있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섬의 위쪽으로 올라서니 특이한 유적 하나가 보이더군요.
'굴립주'였습니다.
굴립주는 건물을 세울 때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전봇대를 세우듯 땅을 파서

기둥을 세우거나 박아 넣어서 만든 건물을 말한다고 합니다.
두 곳의 굴립주 유적이 있었는데, 위치로 볼때 주변을 관찰하는 기능으로서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합니다.

 

 

 

굴립주 유적 앞의 토성의 모습입니다.
꽤 높이가 있는 편이었으며 완도 앞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경이었습니다.

 

 

 

서낭당의 모습입니다.
이곳에서는 매년 '완도 장좌리 당제및 당굿'이 열리는데 모시는 신은,

장보고를 비롯, 송징, 정년, 혜일대사 네 분이라고 합니다.
송징은 고려시대 진도를 거점으로 한 삼별초군을 지휘한 장수로 흉년과 관리들의 횡포로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그 백성들을 구휼해준 사람이며, 정년은 장보고의

어릴적 친구로 함께 당나라 군에서 장보고와 활동했던 사람이라고 하며,
혜일대사는 고려 초기 이곳 완도로 내려와 암자를 짓고 일생을 보낸 고승이라고 합니다.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찍어본 사진입니다.
멀리 고대 뒷편으로 완도의 산봉우리들이 펼쳐졌습니다.

 

 

 

동백꽃 낙화를 카펫처럼 깔아놓은 동백나무 한 그루가 보이더군요.

 

 

 

가까이에서 바라본 고대(高臺)의 모습입니다.
관측소 역할을 했던 건물로 추정을 한다고 하며 성의 바깥쪽과 안쪽, 그리고 멀리

마을까지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고대에서 내려다본 내성문과  바다 건너 마을의 풍경입니다.

 

 

 

고대에서 되돌아본 성벽과 유적지의 모습입니다.
유적지로 지정되기 전, 이곳은 장좌리 사람들이 밭으로 사용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청해진 당시에는 이곳이 여러 건물들과 군사들로 북적이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유적지와 바다가 함께 펼쳐진 풍경을 찍어 봅니다.
잠시, 역사는 잊고 유적지가 보여주는 이런저런 풍경을 감상해 보았습니다.

 

 

 

 

 

 

 

 

 

 

 

 

 

 

 

 

 

 

 

 

 

 

 

유적지를 벗어나 목책이 설치되어 있다는 갯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목책은 청해진 서쪽 해안에서 시작하여 입구까지 약 331m 길이로 갯벌 속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갯벌이 파도에 깎이면서 발견되어 현재 그 일부가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탄소연대 측정 결과, 장보고 시대와 시기가 일치하며 목책은 방어용 또는 선박의 접안시설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을 한다고 합니다.

 

 

 

처음엔 어느 것이 돌인지, 목책인지 구분이 쉽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이 깃발이 있는 곳 주변을 잘 살펴보니 그제서야 목책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소나무라고 하며, 나이테가 선명히 보이는
나무의 크기는 지름 30cm 정도거나 또는 더 큰 크기의 나무들이었습니다.
이 정도 크기의 수많은 목재들을 어디서 구했는 지는 알수 없지만 당시에는 이 목책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조금 더 드러나있는 목책을 찍어 봤습니다.

 

 

 

청해진을 돌아나오면서 다시 찍어본 유적지의 모습입니다.

 

 

 

다리 위에서 다시 바라본 유적지의 모습입니다.
유적지를 직접 보고나니, 그 옛날 바다를 호령했을 장보고의 모습이 더욱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장보고의 동상이 있는 어린이놀이공원을 들러보기로 합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장보고의 동상입니다.
오른손에는 칼이 아닌 지휘봉을, 왼손에는 두루마기로 된 서류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장보고는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사망한 해는 846년이라고 합니다.
본명은 궁복, 또는 궁파라고 하며 완도에서 800년에서 809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을 한다고 합니다.
청년기에 당나라로 건너가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서주(徐州)의 무녕군 소장이 되고,

30세 무렵 신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훗날 신무왕이 되는 김우징의 추천으로 흥덕왕에 의해 청해진 대사가 되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들을 소탕함은 물론 해상무역을 장악하였다고 합니다.

막강한 군사력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장보고는 점점 권력에 눈이 멀었던지,

김우징에 의해 흥덕왕 사후의 왕위계승전에 뛰어들게 되고 승리한 뒤, 46대 문성왕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내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결국 장보고의 세력을 두려워한 대신들의 모의로 한때 자신의 부하였던 염장에게

암살당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영웅이었으나, 피해갈 수 없었던 권력욕 앞에서는 장보고 역시 한낱 범부에

지나지 않았던가 봅니다.
장보고 사후, 결국 장보고가 평생을 바쳐 일구어 놓았던 청해진은 해체가 되었고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고 마는 쓸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이렇게, 완도의 청해진유적지를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