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날의 짧은 여행...... 자운서원과 화석정, 경순왕릉에서~!!

2023. 11. 8. 18:22세상 이야기

 

 

어느덧 가을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있고

단풍은 화려하게 물들어 가는데 가만있기는 뭣하니 가까운 곳으로

단풍이나 보고 오자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섰습니다.

지난 해 파주 자운서원에서 만났던 단풍이 기억에 남아, 일단 그곳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차를 달렸습니다.

주말이어서 인지, 도착하고 보니 주차장엔 역시 단풍을 즐기러 온

놀랍도록 많은 차량들이 주차되어 있더군요.

카메라 만 달랑 챙겨 들고 자운서원의 경내로 들어 섰습니다.

 

 

 

서원의 입구에 서있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빨갛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 선생의 유적지로, 선생을 기리는 서원과 가족 묘역,

그리고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광장을 지나 서원으로 향하는데, 서원 앞에는 은행나무의 노란 낙엽이

뜻밖의 풍경을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흡사 노란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광경이었습니다.

 

 

 

그 풍경에 마음을 뺏겨서 쉬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서원을 배경으로 한 컷 찍어 봅니다.

 

 

 

 

 

 

 

자운서원으로 들어 섰습니다.

자운서원은 조선 광해군 7년, 대학자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서원이라고 합니다.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0년 부터
사당인 문성사의 복원을 시작으로 1997년까지 복원을 끝내고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자운서원은 가을이 이미 지나가 버린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느티나무의 잎은 모두 지고, 담장 너머의 단풍나무 만, 붉게 물들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자운서원을 벗어나, 율곡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여현문을 지나 긴 계단을 따라 묘소로 오르면서 되돌아보니, 곳곳에

가을빛이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율곡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은 가족묘역 형태로, 신사임당의 묘소도

그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먼저, 신사임당의 묘소를 만났습니다.

율곡 선생의 부친인 이원수와의 합장묘로, 부모임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묘소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는 것이 이채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우측의 비석은 근래에 세워진 것으로 보였으며, 소박한 무덤의 모습이었습니다.

선생의 부친이면서 신사임당의 남편이었던 이원수는 결혼 생활 동안

이래저래 신사임당의 속을 많이 태웠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후대에 알려져 있습니다.

변변치 못한 남편으로 인해 많은 속을 끓였을 신사임당으로서는, 합장묘가

그닥 달가운 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사임당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달리 거부할 방법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율곡 선생의 묘소를 드디어 만났습니다.

명성에 비해 소박한 모습이었으며, 부모의 묘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잡은

이유로는, 당시엔 자식일지라도 입신양명하여 높은 벼슬을 지내면 부모보다

더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것이 풍습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한다고 합니다.

 

 

 

선생의 묘는 합장이 아닌, 부부가 각각의 묘를 가진 형태였습니다.

선생의 묘 뒷편, 크기가 작아 보이는 묘는, 부인 곡산 노씨의 묘로

오히려 선생의 묘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율곡 선생은 외가였던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나, 본가인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였으며, 대사헌을 비롯하여 여러 높은 관직을 거친

관료로서 활동하다가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합니다.

 

 

 

선생의 묘소에서 내려다 본 모습입니다.

첫 번째 무덤은 선생의 맏형인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 다음으로

신사임당의 묘소, 가장 아래쪽이 선생의 맏아들인 이경림의 묘라고 합니다.

 

 

 

묘소를 벗어나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선생과 신사임당의 동상을 찍어 봅니다.

단풍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있었습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두 동상의 모습입니다.

 

 

 

 

 

 

 

 

 

 

자운서원을 벗어나 화석정으로 발길을 향했습니다.

화석정은 임진강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정자로서,
임진왜란 당시의 야사를 간직하고 있기도 한 유서 깊은 정자라고 합니다.

 

 

화석정의 모습입니다.

화석정 뒷편으로는 임진강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이었습니다.

 

 

 

화석정은 율곡 이이 선생께서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율곡 선생의 5대조인 이명신에 의해 정자가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다시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화석정에는 임진왜란에 얽힌 야사도 전한다고 합니다.
율곡 선생은 평소 이 화석정에 틈이 날때마다 들기름을 묻힌 걸레로
정자 마루와 기둥을 닦도록 한 뒤,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열어보라.>고 하며
밀봉이 된 편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가는 길에 폭풍우가 심해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쳤다고 합니다.
이에 피난길을 따르던 이항복이 밀봉된 편지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기름이 잘먹은 화석정에 불을 지르자, 임진나루 근처가 대낮같이 밝아져서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화석정에는 율곡 선생의 시가 적혀 있는 시비도 있었습니다.

시비 너머로 임진강의 모습이 바라 보였습니다.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시인의 시상(詩想)이 끝이 없구나.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

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화석정을 지나 다음으로 향한 곳은 '경순왕릉'이었습니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마의태자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왕릉의 위치가 비무장지대가 가까운 곳에 있다보니,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텅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경순왕릉이 보였습니다.

 

 

 

경순왕릉을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경순왕은 신하들과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 준 뒤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아 정승공에 봉해졌다고 합니다.

고려 경종 3년인 978년에 개성에서 세상을 떠난 뒤, 이곳에 능이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능은 그 후로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가, 조선 영조임금 시대에

다시 능의 위치를 확인하고, 조선시대의 묘의 형식으로 재단장하였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현재의 모습이었습니다.

 

 

 

신라의 임금들 중에는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지역에 왕릉이 조성되어 있는

왕으로, 일설에는 사망 후 경주로 가기 위해 운구를 하던 중 근처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자칫 운구가 경주에 도착하면 신라인들의 민심의 동요가 일어날 것을 우려한 고려가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라는 구실을 들어 이곳에 묘를 정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고 합니다.

 

 

 

경순왕릉의 전체 모습을 찍어 본 것입니다.

역사에서, 나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왕들은 뜻하지 않게 오래토록 그 이름을

남기는 편이며, 그만큼의 치욕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제는 역사가 되었으니... 평안히 잠들어 계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느 가을날의 짧은 여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