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2. 18:50ㆍ아름다운 글
이별의 말
그리고 이제 저녁이 되었다.
여자 예언자 알미트라가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당신의 영혼 위에 축복이 내리길.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말하는 자가 나였던가?
나 또한 듣는 자가 아니었던가?
이윽고 그는 사원의 계단을 내려갔고 사람들은 모두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자신의 배에 이르러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돌아서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 높여 말했다.
오르팰리스의 사람들이여!
바람이 나로 하여금 너희로부터 떠나게 하는구나.
내 마음은 바람만큼 급하지 않건만 이제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 방황하는 무리들은 더욱 외로운 길을 찾아서 떠난다.
그리고 하루를 마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다음날을 시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석양이 지는 곳에서 우리를 놓친 태양은 아침이 되어도
그곳에서 우리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대지가 잠든 시간에도 우리는 길을 간다.
우리는 생명의 바퀴를 멈추지 않는 나무의 씨앗들이니,
무르익고 그득해지면 우리를 바람에 맡겨 바람이 부는 대로 흩어지리라.
짧기도 하였어라, 너희와 함께 지낸 나의 날들은.
그리고 너희에게 해준 나의 말들은 더욱 짧았노라.
그러나 내 목소리가 너희의 귓전에서 사라지고 내 사랑이
너희의 기억속에서 자취를 감출때면 나는 다시 올 것이다.
그리고 풍부한 가슴과 입술을 가지고 영혼에 순종하면서 너희에게 말하리라.
그렇다, 다시 찾아오는 조수를 따라 돌아오리라.
비록 죽음이 나를 가리고 거대한 침묵이 나를 감싸더라도
나는 너희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다시 오리라.
그리고 나의 열정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한 말이 진실이라면, 진리는 더 분명한 목소리와
너희의 생각에 더 가까운 말로 너희에게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나는 바람과 함께 간다, 하지만 오르팰리스 사람들이여!
허공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 너희의 욕구와 나의 사랑이 충족되지 못했다면 다음날을 기약하자.
인간의 욕망은 변하지만 그의 사랑과 사랑이 충족시켜야 할
욕망은 변하지 않는 것.
그러므로 내가 거대한 침묵으로 부터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라.
새벽이 되어 들판에 이슬만 남겨놓고 사라지는 안개는
구름을 따라 올라가 비가 되어 내린다.
그리고 나 역시 안개와 다르지 않다.
내가 밤의 고요함 속에서 너희의 거리를 지날 때
나의 영혼은 너희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너희 심장의 고동은 내 가슴속에 있었고 너희의 숨결은
내 뺨 위를 감돌았으며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나는 너희의 즐거움과 고통을 알았고,
잠속에서 너희가 꾸는 꿈은 나의 꿈이 되었다.
때때로 나는 산 속에 있는 호수처럼 그대들 속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너희의 산정을 비추었고 비탈진 기슭과
너희를 스치는 생각과 욕망의 구름떼까지도 비추었다.
그리고 나의 침묵속으로 냇물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밀려왔고,
또 강물처럼 젊은이들의 야망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마음의 심연에 까지 다다랐을 때에도
냇물과 강물은 노래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웃음소리보다 더 달콤한 것이,
야망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너희 속에 있는 무한함이었다.
드넓고 광활한 그분의 품속에서 너희란 단지 세포이며 힘줄.
그분의 노래 속에서 너희의 노래는 다만 소리없는 고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 광활하신 분 속에서 너희도 광활하고,
그분을 보듯 내 너희를 보았고, 또 사랑했다.
광활한 우주 속에 사랑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이 있겠는가?
어떤 환상, 어떤 기대감이 그 사랑을 보다 높이 날아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수원의 사과나무에 파묻힌 거대한 떡갈나무와도 같이
드높고 광활한 그분은 바로 너희 속에 있다.
그분의 힘이 너희를 대지에 묶고, 그분의 향기가 너희를 허공에
오르게 한다. 그리하여 그분의 영원 속에서 너희는 불멸하리라.
너희는 들었으리라.
너희는 마치 쇠사슬의 고리 중 가장 약한 고리처럼
약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반쯤만 옳을 뿐, 너희는 그 쇠사슬 중에서
가장 강한 고리만큼 강하기도 한 것이다.
가장 사소한 행위로 너희를 재려는 것은 덧없는 거품으로
대양의 힘을 재려는 것과 같다.
너희들의 실패로 너희를 심판하려는 것은
계절이 바뀐다고 해서 계절을 책망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 너희는 대양과도 같다.
비록 좌초된 큰 배가 모래톱에서 조수를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너희는 조수를 재촉할 수 없다.
너희는 또한 계절과도 같다. 비록 한 겨울에 봄을 부정하더라도
봄은 너희 속에 누워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화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로 하여금
"그는 우리를 칭찬했네. 그는 우리 속에서 선만을 보았네."하는 말을
서로 주고받게 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나는 너희가 스스로 깨닫고 있는 생각을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니.
그런데 말의 지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말없는 지식의 그림자일까?
너희의 생각들과 말들은 우리의 과거를 지켜주는 추억의 파도이다.
우리는 물론 대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태고의 낮과,
혼돈으로 어지럽던 대지의 밤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다.
현명한 자들은 너희에게 지혜를 주려고 오지만
나는 너희에게서 지혜를 뺏으려고 왔다.
그리고 나는 너희 속에서 지혜보다 더 위대한 것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너희 속에서 스스로 불타고 있는 영혼이다.
하지만 너희는 그 불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흘러가 버리는 너희의 시간들만 슬퍼하고 있다.
육체안에서만 만족하고자 하는 삶은 무덤을 두려워 한다.
그러나 여기엔 무덤이 없다.
저기 저 산과 들은 그대들의 요람이며 디딤돌이다.
너희들 조상들이 묻혀 있는 들판을 지날 때마다 잘 보라.
그러면 너희와 너희 아이들이 거기서 손잡고 춤추는 것을 보게 되리라.
참으로 너희는 알지 못하면서 즐거워 한다.
다른 이들이 너희의 믿음을 위해 황금 같은 약속을 주려고 왔지만
너희는 다만 부와 권력과 영광이라는 선물만으로 보답했다.
내가 준 약속은 너희에게 보잘것없었지만 그래도 너희는 내게 더욱 관대했다.
너희는 삶에 대한 깊은 목마름을 내게 주었다.
확실히 인간에게 자기의 모든 목표를 타오르는 입술로 바꿔주고
삶 전체를 샘물이 되게 해주는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없다.
그리고 여기에 나의 영광, 나의 보상이 있으니,
내가 찾는 샘물을 만나 그것을 마실 때마다 나는
샘물 자신도 살아있어 스스로 목말라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내가 샘물을 마실 때 샘물 역시 나를 마시는 것이다.
너희 중 어떤 이는 내가 오만하리만큼 결백해서
보상받기를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해 왔다.
보상을 받기에는 내 자존심이 너무 강하지만
너희가 준 선물인 샘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너희의 식탁에 앉혔을 때,
내 비록 언덕에서 딸기를 먹었을지라도.
또한 너희가 기꺼이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을 때,
내 비록 성전의 문 곁에 누워 있었을지라도.
나 언제나 달콤한 음식을 먹으며 희망에 차서 단잠을 잘 수 있었음은
나의 낮과 밤을 보살펴 준 너희의 사랑 덕분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최고의 축복이 내리길 바란다.
너희는 많은 것을 베풀었지만 자기가 무엇을 베풀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진실로,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친절은 돌로 변하고
스스로를 달콤하게 부르는 선행은 저주를 낳는 부모가 된다.
너희 중 어떤 이는 또 내가 너무 냉담하며 자기만의 고독에
취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희는 말한다.
"그는 숲의 나무들과는 속삭여도 인간들과는 말하지 않고,
언덕 위에 홀로 앉아 우리의 도시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다."
하기야 내가 산을 오르고 먼 곳을 돌아다녔던 것이 사실이다.
내가 그렇게 높이, 그렇게 멀리서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너희들을 볼 수 있었겠는가?
멀리 있지 않고서야 진실로 어떻게 가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너희 중 어떤 이는 나를 소리없이 부른다.
"낯선 이여, 낯선이여,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랑하는 이여,
왜 당신은 독수리들이나 둥지를 트는 산꼭대기에 사십니까?
당신은 왜 불가능을 추구합니까?
무슨 폭풍을 당신의 그물에 담으려 합니까?
어떤 환상의 새를 하늘에서 잡으려 합니까?
오셔서 저희와 하나가 됩시다. 내려오십시오.
그리고 저희의 빵으로 당신의 굶주림을 달래고,
저희의 포도주로 당신의 갈증을 푸소서."
고독한 영혼으로 그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독이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내 오직 너희의 기쁨과
너희의 고통의 비밀을 찾고 있었을 뿐이었음을 알았을 것을.
그리고 허공을 거니는 너희의 보다 큰 자아를 잡으려 했다는 것을.
하지만 사냥꾼이란 또한 동시에 사냥당하는 자.
그러므로 내 활시위를 떠난 수많은 화살은 오직 내 가슴을 찾기 위한 것.
날아가는 자는 또한 기어가는 자.
왜냐하면 내 날개가 태양 속에 펼쳐질 때
땅에 비친 그 그림자는 거북의 모습이었기 때문.
그리고 믿는 자인 나는 또한 의심하는 자이니.
때때로 나는 내 상처에 스스로 손가락을 찔러 넣어야만 했다.
너희보다 큰 믿음을, 너희보다 큰 지혜를 얻지 않을까 하고.
그리하여 나의 이 믿음과 지혜로 말한다.
너희는 너희의 몸과 함께 갇혀 있는 것이 아니며,
집이나 들이 너희를 가두어 놓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산 위에 살며 바람 따라 헤매는 너희.
따스함을 찾아 햇빛 속을 기어가거나,
안전을 찾아 어둠속에 구멍을 파는 생명이 아닌,
다만 자유로운 생명, 대지를 감싸고 창공을 흐르는 하나의 영혼.
이 말들이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말라.
종잡을 수 없고 흐릿한 것이야말로 만물의 끝이 아니라 시초이니,
너희는 언제까지나 시초로서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노라.
생명, 그리고 또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결정체가 아니라
안개 속에서 잉태되는 것.
하지만 누가 알랴, 결정체 또한 사라지는 안개가 아니던가?
너희 나를 기억할 때면 다음 말도 기억해 주기를 바라노라.
너희 속에서 가장 연약하게 흔들리는 것이 가장 강하고 굳센 것임을.
너희의 뼈대를 곧게 세우고 굳건히 하는 것은 너희의 숨결이 아니던가?
그리고 너희의 도시를 세우고 사회를 이루는 것은
일찍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꿈이 아니던가?
너희 숨결의 흐름만 볼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보지않아도 되는 것을.
또한 너희 꿈의 속삭임만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소리도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하지만 너희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니, 이는 당연한 귀결.
너희의 두 눈을 가린 베일은 그것을 짰던 손이 벗겨 주리라.
또한 너희의 두 귀에 가득한 진흙도 처음 반죽해 넣었던
손가락이 파내 주리라.
너희는 보게 되리라.
그리고 듣게 되리라.
그럼에도 너희는 눈멀었음을 한탄하지 않고,
귀먹었음을 후회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그날이 오면 너희는 만물에 깃들인
비밀의 목적들을 알게 될 것이므로.
그리하여 빛을 축복하듯 너희 어둠도 축복하게 되리.
이런 말들을 하고 나서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그의 배의 키잡이가
키 옆에 서서 이제 가득 부푼 돛과 또 먼 곳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알무스타파가 말했다.
끈기있고 또 끈기있도다, 선장이여.
바람이 분다. 이제 돛은 쉬지 못한다.
키도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선장은 묵묵히 나의 침묵만을 기다리고 있구나.
그리고 위대한 바다의 합창을 들어 온 나의 선원들,
그들 또한 끈기있게 내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도 더 이상은 기다리지 못하리.
나 또한 떠날 준비가 되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렀고, 위대한 어머니는 다시 한번
자기 아들을 품에 안는다.
잘 있으라, 오르팰리스 사람들이여.
오늘은 끝났다.
마치 내일을 향해 눈을 감는 수련처럼 오늘은 우리 위로 가 버린다.
여기서 얻은 것을 우리는 간직하리.
만약 그로써 충분치 못하다면, 그때 우리 다시 함께
시혜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리라.
내 너희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잊지 말라.
잠시, 내 갈망이 먼지와 거품을 거두어 다른 몸으로 태어나리라.
잠시, 바람 위로 한 순간의 휴식이 오면, 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안녕, 그대들이여, 또 함께 보낸 청춘이여.
우리가 꿈길에서 만난 것도 다만 어제의 일.
내가 홀로 있을 때 너희는 노래를 불러 주었고,
너희가 갈망하여 나는 하늘에 탑 하나를 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 잠은 사라지고 꿈도 끝났으며, 새벽도 가버렸다.
한낮이 닥쳐와 우리의 희미하던 잠이 깨어 버렸으니, 이제 헤어져야만 하리.
만약 기억의 새벽빛 속에서 우리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너희는 더 그윽한 노래를 내게 불러 주게 되리라.
그리하여 만약 우리의 두 손이 또다른 꿈속에서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늘에 또 하나의 탑을 세우게 되리라.
그가 뱃사람들에게 신호하자 그들은 이내 닻을 올리고
항구를 빠져나가 동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한 사람의 가슴에서 터져나오듯 사람들로 부터
울음소리가 일제히 터져나왔다. 울음소리는 황혼 사이로 떠올라
마치 거대한 나팔 소리처럼 바다 위로 울려퍼졌다.
오로지 알미트라만이 말이 없었다.
안개 속으로 배가 사라질때까지 응시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버린 뒤에도 그녀는 여전히 홀로 방파제 위에
서 있었다. 가슴 속 깊이 그의 말을 새기면서.
"잠시, 바람 위로 한순간의 휴식이 오면,
또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