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 지브란... < 예언자 >...... 배가 오다. 사랑에 대하여. 결혼에 대하여

2024. 12. 12. 19:06아름다운 글

 

 

 

 

 

 

 

배가 오다

 

알무스타파, 저 선택된 자이며 사랑받는자,

자기 시대의 새벽빛이었던 그는 오르팰리스 성(城)에서

열 두 해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태워 자기가 났던 섬으로 데려다 줄 배가 돌아오기를.

마침내 열 두 해가 지난 이엘룰의 달, 곧 추수의 달 칠일째에

그는 성밖 언덕에 올라가 멀리 바다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배가 안개에 싸여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가슴의 문이 활짝 열리고 기쁨은 날개를 쳐서 멀리 바다 위로 날았다.

그는 눈을 감고 영혼의 침묵들 속에 기도 드렸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올 때 문득 슬픔이 밀려와

그는 마음 속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어찌 편안히 떠날 수 있으랴, 슬픔도 없이?

아니다. 영혼의 상처 없이는 나는 이 성을 떠날 수 없다.

내 여기 성벽 안에서 보낸 고통의 날들은 너무 길었고, 또 외로운

밤들도 너무 길었으니, 이 고통과 외로움을 한 점 후회없이 작별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이 거리 거리에 뿌린 내 무수한 영혼의 조각들,

벌거벗은 채 이 언덕들 사이로 헤매던 내 숱한 바램의 세월들,

내 어찌 무거운 생각없이, 아픔없이 이들을 떠날 수 있으랴?

오늘 내가 벗어 버리는 이것은 한낱 옷이 아니라, 내 손으로 벗기는 살이요,

또한 내 뒤에 남기고 가는 이것은 한낱 생각이 아니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더욱 부드러워진 심장인 것을.

 

그러나 나는 더 머뭇거릴 수 없다.

온갓 것을 자기에게로 불러 가는 저 바다가 나를 부른다.

이제 나는 배에 올라야 한다.

시간이 아무리 밤새껏 타오른다 해도,

머문다는 것은 얼어서 굳어 버리는 것이고, 틀에 묶이는 것이니까.

내 마음이야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을 데려가고 싶지만 내 어찌 그럴 수 있으랴?

목소리란 자기를 날려 보내는 혀와 입술까지 데려갈 수 없는 것,

홀로 창공을 날아가야 한다.

독수리도 둥지는 버리고 홀로 해를 향해 날아올라야 한다.

 

언덕 아래 이르렀을 때 그는 다시 한번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그는 자기 배가 항구로 다가오고 있는 것과, 뱃머리에 자기의 고향 사람인

뱃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영혼은 그들을 보고 외쳤다.

우리 옛 어머니의 아들들아, 그대들 물결을 타고 온 자들아.

그대들은 얼마나 자주 내 꿈 속을 항해했었는가!

그런데 이제 그대들은 내가 깨어있을 때 나를 찾아왔느니,

깨어있는 이것은 나의 더 깊은 꿈.

떠날 준비가 끝났다. 내 마음은 잔뜩 돛을 달고 바람만 기다리고 있다.

이제 한 숨만 더 이 고요한 대기 속에서 숨쉬면, 이제 한번만 더 애정어린

길로 뒤돌아보고 나면, 그러면 그 다음엔 나는 그대들 속에,

뱃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서게 되리라.

그리고 그대 망망한 바다. 잠들지 않은 어머니여,

모든 강물과 시냇물에게 유일한 평화이며 자유인 그대여,

이제 이 시냇물이 한 번만 더 굽이 돌면, 한 번만 더 이 숲 사이에서

속삭이면, 그러면 그 다음엔 나는 그대에게로 가리라,

한없는 한 방울이 한없는 큰 바다로.

 

그리고는 그가 걸어내려갈 때 저 멀리 남자와 여자들이

들녘과 포도밭을 떠나 서둘러 성문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또 그들의 목소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며, 밭에서 밭으로

서로 외치면서 그들은 그의 배가 오고 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혼자서 생각했다.

헤어지는 날이 곧 모이는 날이어야 하는 것인가?

또 내 마지막 저녁이 정말로는 내 새벽이라 해야 하는 것인가?

밭을 갈다 말고 쟁기를 밭고랑에 내던지고 오는 사람, 포도주를 짜는 틀을

밟다 말고 바퀴를 내려놓고 오는 사람에게 나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 것인가?

내 가슴이 열매 달려 휘늘어진 나무 되어 그 열매를 따 그들에게 줄 것인가?

또 내 소원이 샘물처럼 흘러 그들의 잔을 채울 것인가?

내가 거문고 되어 전능하신 이의 손길이 나를 퉁기고, 혹은 피리 되어

그 분의 숨결이 나를 통하여 흐르게 할 것인가?

나는 침묵을 찾는 자, 그 침묵 속에서 내 무슨 보배를 찾은 것 있어

저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베풀 수 있을까?

오늘이 만일 나의 거두는 날이라면, 나는 씨를 어떤 밭에 뿌렸으며,

또 어느 기억 못하는 시절에 뿌렸던 것일까?

지금이 정말로 내가 등불을 켜들 시간이라 해도, 그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내 불꽃일 수 없다.

나는 다만 텅 빈 깜깜한 등잔을 들어올릴뿐,

그러면 저 밤의 파수꾼이 거기 기름을 채우고 불을 켜리라.

이렇게 말했으나, 그의 가슴 속에는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많았다.

그 스스로도 깊고 깊은 자신의 비밀은 말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성안에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만나러 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이때 마을의 어른들이 앞으로 나아와 말했다.

아직 우리를 떠나지 마시라.

당신은 우리가 황혼녘일 때에도 한낮의 빛이었고,

당신의 젊음은 우리에게 꿈을 주었다.

당신은 우리에게 낯선 자도, 손님도 아니며,

그보다도 우리의 아들이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자이니,

아직도 우리의 눈이 당신의 얼굴을 그리워하며 슬픔에 젖게 하지 마시라.

 

그러자 남녀 성직자들도 말했다.

지금 바닷물결이 우리를 갈라놓게 하지 마시라. 그리하여 당신이 여기

우리와 함께 지낸 날들이 기억으로만 남게 하지 마시라.

당신은 우리 사이에서 언제나 빛나는 정신으로 걸었고,

당신의 그림자는 우리 얼굴에 비치는 빛이었다.

우리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던가. 다만 우리의 사랑은 말이 없었고

너울에 가리워져 있었을 뿐.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사랑이 소리 높여 당신에게 외치고

당신 앞에 모습을 나타내리라.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그 깊이를 모르는 법.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달려와 간절히 청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

가까이 서 있던 이들은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는 것을 보았다.

그런 다음 그와 마을 사람들은 사원 앞 큰 마당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에 거기 사원에서 한 여인이 나왔다.

그 이름은 알미트라, 바로 여자 예언자였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한 눈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성에 와서 단 하루밖에 안 되었을 때 맨 먼저 그를 알아보고

믿은 것이 바로 그 여인이었다.

여인은 기쁘게 그를 맞아들이며 말했다.

하느님의 예언자시여, 당신은 저 맨끝을 찾자고 오랫동안 먼거리를

헤매며 당신의 배를 기다렸다.

이제 배가 왔으니 당신은 떠나야 하리라.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나라, 당신의 가장 큰 소원이 깃든 곳,

그곳에 대한 당신의 그리움과 바램은 깊고 깊으니,

우리가 당신을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으로 당신을 묶어둘 수 없고,

우리에게 당신이 필요하여도 그 필요가 당신을 붙잡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를 떠나기 전에 부탁이 있으니,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를

말씀해 달라.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전하고, 아이들이 자라

또 자기의 아이들에게 전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리라.

당신은 외로운 가운데 우리 시대를 지켜 주었고,

우리가 잠 속에서 울고 웃고 하는 것을 당신은 늘 깨어있어 다 들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보여 주고, 당신의 눈에 비친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말씀해 달라.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오르팰리스 사람들아, 지금 너희들의 영혼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바로 그것말고 내가 또 무슨 말을 새롭게 할 수 있으랴?

 

 

사랑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가 말했다.

우리에게 사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사람들 머리 위로 날개처럼 내렸다.

이윽고 그는 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너희를 손짓하거든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어렵고 험할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너희를 품거든 그에게 자신을 온통 내 맡겨라.

비록 그 날개깃 속에 숨은 칼이 너희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그리고 사랑이 너희에게 말할 땐 그를 믿으라.

비록 북풍(北風)이 저 뜰을 폐허로 만들 듯 사랑의 목소리가

너희의 꿈을 흐트러 놓을지라도.

 

왜냐하면 사랑은 너희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지만,

또 너희를 십자가에 못박기도 하니까.

사랑은 너희를 성숙시키지만, 또 너희를 꺾어 버린다.

사랑은 너희의 꼭대기에 올라가 햇볕에 하늘거리는 그 연한

가지를 어루만져 주지만, 또한 너희의 뿌리로 내려가 땅에

얽히지 못하도록 흔들어댄다.

 

사랑은 곡식 단을 거두듯이 너희를 자기에게로 거두어 들이며,

사랑은 너희를 타작하여 알몸으로 만들고,

사랑은 너희를 키질하여 껍질을 털어 버리며,

사랑은 너희를 갈아 흰 가루로 만들어,

사랑은 너희를 반죽하여 부드럽게 하며,

그런 다음 사랑은 너희를 자기의 거룩한 불에 올려 거룩한 떡으로

구워 신(神)의 거룩한 잔치에 내놓는다.

사랑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베풀어 너희로 하여금 마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며, 그 깨달음으로 너희는 큰 생명의 마음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러나 만일 두려운 생각에 사랑의 평안과 사랑의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면,

차라리 너희의 알몸을 가리고 사랑의 타작마당을 빠져 나가는 게 좋으리라.

거기서 나가 저 계절도 없는 세상으로,

웃어도 채 웃지 못하며, 울어도 채 울지 못하는 그 곳으로.

 

사랑은 저 자신밖에 아무 것도 주는 것이 없고,

저 자신밖에는 아무 것도 받는 것이 없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으며, 누구의 소유가 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사랑만으로 충분한 것.

 

사랑할 때 너희는 "신이 나의 마음 속에 계신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보다도 "나는 신의 마음 속에 있다"하라.

또 너희가 사랑의 길을 지시할 수 있다 생각지 말라.

너희가 자격이 있다 여겨지면 사랑이 너희의 길을 지시할 것이므로.

 

사랑은 바라는 게 없고 다만 사랑 자체를 채울 뿐.

그러나 너희가 만일 사랑하면서도 또다시 어떤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거든

이것이 너희의 바램이 되게 하라.

서로 녹아서 흘러가며 밤을 향해 노래 부르는 시냇물처럼 되기를.

너무나 깊은 애정의 고통을 알게 되기를.

스스로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 상처받게 되기를.

그리하여 기꺼이, 즐겁게 피 흘리게 되기를.

새벽에는 날개달린 마음으로 일어나 또 하루 사랑의 날을 보내게 되었음을

감사하게 되기를.

낮에는 쉬며 사랑의 황홀한 기쁨을 명상할 수 있기를.

저물 무렵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기를.

그리고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마음 속으로 기도하고,

입술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잠들게 되기를.

 

 

결혼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가 다시 물었다.

스승이시여, 결혼은 무엇입니까? 그는대답하였다.

너희는 함께 태어났으니, 영원히 함께 하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너희의 생애를 흩어 버릴 때에도 너희는 함께 있으리라.

그렇다, 신의 말없는 기억 속에서도 너희는 함께 있으리라.

그러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 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거문고의 줄들이 한 가락에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마음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마음 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으니.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는 말라.

성전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