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주변의 국보 석탑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과 <황룡사지>에서~!

2021. 5. 6. 07:05박물관.문화재

 

경주 주변의 국보로 지정된 석탑들을 모두
둘러보기로 하고 세 번째로 찾아간 곳은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었습니다.
석가탄신일인 4월 초파일이 가까워서 인지 모전석탑 주변은
3면이 울긋불긋한 연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아침 시간이라 아직 다른 관광객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더군요.
다행히 모전석탑을 방해받지 않고 찍어 볼 수 있었습니다.

 

탑돌이를 하면서 치성을 드리고 있는 어느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찍어 봤습니다.
부디, 그 염원이 꼭 이루어지시길 기원드립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세운 것으로 전해지므로, 남아 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이라고 합니다.

 

흑회색의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으로, 지금은 3층만 남아있지만 원래는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 들에 의해 수리된 모습이라고
합니다.

 

1층은 각 면마다 이렇게 문을 만들어 두고 문 양쪽에는
이렇게 금강역사상을 돌로 새겨 배치해 두었더군요.

 

탑의 바닥돌 네 모서리에는 이렇게 사자상을 각 하나씩
세워 두었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분황사 모전석탑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처음 세워졌을 때의 원형을 추측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변해버린 모습이지만, 초창기의 모습은 굉장히
웅장하고 규모가 컸을 것으로 짐작이 되었습니다.

 

모전석탑을 좀 더 가깝게 찍어 봤습니다.
모전석탑은 벽돌을 구워 쌓아올린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 모양으로 조각하고 다듬어 쌓아올린 석탑으로
저 수많은 돌들을 어떻게 자르고 다듬어서 쌓아 올렸는지...
바라보는 내내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모전석탑의 모서리 부분을 찍어본 것입니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분황사를 나섰습니다.
15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풍파를
겪으면서 비록 원래의 웅장한 모습은 잃어버렸지만,
현재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그 아름다움과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었던 소중한 문화재였습니다.

 

분황사 앞에는 푸른 청보리밭이 한창이었습니다.
그 보리밭을 배경 삼아 인증샷을 남기려는 사람들의
모습도 여럿 보였습니다.

 

그 청보리밭 사이에 서있는 당간지주의 모습입니다.
'경구 구황동 당간지주'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분황사와 가까이 있어서 분황사의 당간지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을 한다고 합니다.

 

당간지주를 다시 찍어 봅니다.

 

분황사와 멀지 않은 곳에는 황룡사지가 있더군요.
청보리밭 옆 길을 따라 걸어서도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룡사지도 돌아보기로 합니다.

 

황룡사지 한켠에 나무 한 그루가 황룡사지를 지키듯
우뚝 서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황룡사지 너머로 경주 남산의 모습이 바라 보였습니다.

황룡사는 신라의 대표적인 왕실 사찰로, 삼국시대 가장
규모가 컸던 사찰이라고 합니다.
신라 3보인 장육존상과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던
구층목탑이 있었던 사찰로 유명한 곳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대에
궁궐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 하자, 황룡이 나타나서
그곳에 황룡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다고 하며, 진평왕 대에
장육존상을 만들어 안치하고 선덕여왕 대에 구층목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후 고려시대까지 호국사찰로서 그 기능을 이어왔으나
안타깝게도 1238년 몽골 침입 당시 모두 불타버리고 현재는
이렇게 절터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마침 기차가 남산을 배경 삼아 지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황룡사지 구층목탑지 부터 둘러보기로 합니다.

 

목탑지에는 목탑을 세웠을 때 사용되었던 주춧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놓여져 있었습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탑신부 약 62m, 상륜부 약 15m로 전체 높이가 80m 정도로
요즘으로 치자면 아파트 27층 정도의 높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 어떻게, 현재의 기술로도 결코 복원이 쉽지 않은
구층목탑을 세울 수 있었는 지, 그야말로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구층목탑은 선덕여왕 대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법사의 발원으로, 643년 백제 장인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이간, 용춘과 함께 200여 명을 거느리고 2년 동안 작업하여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그 위용을
유지하여 왔으나, 몽골 침입 당시 황룡사와 함께 불타면서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목탑지 맞은 편에는 장육존상이 세워져 있었던
중금당 터가 있었습니다.

 

중금당 터에는 그 장육존상이 세워져 있었던 거대한 크기의
석조대좌가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장육존상은 가운데 본존불인 장육상이 세워지고 좌우로
협시불이 세워졌는데, 이를 합쳐 금동장육삼존불상이라 부르며
그 크기는 약 5m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육존상 좌우로는 16구의 제자상이 세워졌는데
그 제자상을 세웠던 석조대좌 역시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 사진은 우측 석조대좌의 모습입니다.

 

좌측 석조대좌의 모습입니다.
중금당 안에는 장육존상까지 합쳐 모두 19구의 불상이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대좌는 모두
17기라고 합니다.

 

황룡사는 진흥왕 대에서 부터 선덕여왕 대에 이르기까지
약 93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성한 사찰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고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국력을 총동원하여 대규모의 사찰을 지은 것은, 어쩌면
호국불교를 발판 삼아 나라와 백성을 지켜내고 더욱더
나라를 발전 시키고 싶었던 신라 왕들의 간절한 염원의 발현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룡사지는 바로 그 간절함이 곳곳에 깃들어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할 것입니다.

 

 

 

 

 

황룡사지 건너편으로 멀리 삼층석탑 하나가 보였습니다.
바로 미탄사지 삼층석탑이었습니다.

이렇게, 분황사와 황룡사지를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