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의 역사적 현장... 강화 광성보에서~!

2022. 7. 29. 06:35여행 이야기

 

마침 강화도를 지나는 길에
꼭 한 번 들러보고 싶었던 광성보를 들러 보았습니다.
광성보는, 조선 말 강화도를 침범한 미국 군대를 맞아
사투를 벌였던 신미양요의 역사적 현장을 간직한 곳으로,
이 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전투 중
목숨을 잃은 350여 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격전지였던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가 함께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광성보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서
소나기를 뿌리기도 했지만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광성보 경내를 천천히 둘러 보았습니다.

 

광성보 입구엔 마침 배롱나무꽃이 활짝 핀 채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광성보의 성문인 안해루의 모습입니다.
광성보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처참하게 함락된 후
체계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조선 효종임금 9년에
강화 해협 주위에 설치한 12개의 진과 보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신미양요 당시 누각과 성이 파괴되었던 것을 1976년에
새롭게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안해루 옆에 설치되어 있는 광성돈대의 모습입니다.
돈대는 성안의 높은 곳에 축조한 포대를 말한다고 합니다.
외곽에 성을 쌓고 포를 쏘거나 사방을 관망할 수 있게 만든
작은 보루의 역할을 하는 군사시설이라고 합니다.


 




 

광성돈대 안에 설치되어 있는 포의 모습입니다.
대포(大砲).소포(小砲).불랑기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성문을 지나 손돌목돈대로 향하는 길은 좌우로
소나무가 우거져 있는 운치있는 길이었습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풍경을 감상해도 좋을 길이었습니다.


 

소나무길이 끝나는 곳에서 만나는 쌍충비각입니다.
쌍충비(雙忠碑)는 이름 그대로, 충신을 기리기 위해 나란히 세워둔
두 기의 비석을 일컫는 말로,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을 기리는 비석이라고 합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을 추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쌍충비가 세워져 있는 쌍충비각의 모습입니다.


 

쌍충비각 옆에 자리잡고 있는 또다른 구조물입니다.
구조물에는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라고 쓰여져 있더군요.


 

쌍충비각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는 무덤군입니다.
신미순의총으로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전사자들 중에서 어재연. 어재순 형제는 충북 음성군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알 수가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고 합니다.


 

신미순의총을 지나니, 드디어 신미양요의 최대 격전지였던
손돌목돈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손돌목돈대는 조선 숙종 5년에 축조된 돈대로 성곽의 길이가
108m이며, 원래는 중앙에 세 칸의 무기고와 포좌 3개를 갖춘
돈대였다고 합니다.


 

손돌목돈대 내부의 모습입니다.
신미양요 당시 이곳을 침략해온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라고 합니다.


 

신미양요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871년(고종 8년)
미국 군함이 통상조약을 구실삼아 강화도에 쳐들어옴으로써
일어난 사건입니다.


 

먼저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이 이곳 광성보까지 진격을 하면서
이곳을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조선 수군은 신식 무기를 갖춘 미군을 맞아 그야말로 혈투에 가까운
전투를 벌였지만,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53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광성보는 결국 함락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상대적으로 미군의 피해로는 겨우 3명이 전사,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53명 전사는 고종실록에 나타나 있는 조선의 집계 기록으로
미군이 작성한 기록에는 전사 243명 익사 100여명, 포로 20명으로
전사자가 무려 35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어느 기록이 정확한 기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광성보에 주둔한
조선 수군이 약 600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미군측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기도 합니다.


 

돈대 앞에는 당시의 자료 사진도 전시 되어 있었습니다.
수자기는 군대에서 대장이 사용하던 군기(軍旗)라고 합니다.


 




 




 

용두돈대로 향하면서 바라본 손돌목돈대의 모습입니다.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는 광성포대의 모습입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고종 11년에 강화도의 여러 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모습은 2004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복원 정비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포대 앞에는 개망초꽃이 하얗게 포대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광성보의 맨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용두돈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해안가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는 용두돈대의 모습이
바라보입니다.


 

용두돈대의 모습입니다.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로서, 손돌목돈대에
속해있는 외곽 초소겸 포대라고 합니다.
고종 8년에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치열한 포격전이 펼쳐졌던
현장이라고 합니다.


 

용두돈대의 중앙에는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라는
글씨가 새겨진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용두돈대에 전시되고 있는 포의 모습입니다.
크기로 보아 소포(小砲)로 보였습니다.

이렇게 광성보를 모두 돌아보고 나니, 소나기를 뿌리면서
잔뜩 흐려있던 하늘이 다시 파랗게 열리고 있었습니다.
잊혀진 역사가 되지 않도록, 잘 복원되고 정비되어 있는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니 마음마저 뿌듯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다가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을 위한, 가장 뜨거운 위로와 추모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광성보의 모습이었습니다.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초지진도 들러 보았습니다.
이미 오후 6시가 넘은 시간이어서 초지진의 내부는
둘러 볼 수 없었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풍경만이라도
몇 장 남겨보기로 합니다.


 

초지진은 조선 후기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든 여러 요새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초지진은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게 점령을 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 되었고, 윤요호 사건 때는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었습니다.


 

초지진의 명물인 소나무의 모습입니다.
수령은 약 400년이며, 1656년(효종 7년) 강화유수 홍중보가
초지진을 설치할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소나무에는 윤요호 사건 당시, 일본군과 포격전을 벌일 때
날아온 포탄에 의해 생겨난 상처가 남아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초지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허물어져
성벽의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1970년 대에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뼈아픈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광성보와 함께 근대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유적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광성보와 초지진을 둘러보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