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석탑과 국립익산박물관에서 만난 사리봉영기~!

2023. 10. 2. 06:40박물관.문화재

 

 

 

마침 부여와 익산을 지나는 일이 있어, 부여의 백제금동대향로를

먼저 만나 본 후, 익산을 들러 미륵사지도 들러 보았습니다.

미륵사지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이미 여러차례 들러 보았지만 미륵사지석탑은  바라볼 때마다

여전히 그 위엄을 뽐내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였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약 20여 년 간의 보수와 복원 작업을 마치고 2019년 초에

드디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복원을 위해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장엄구와 석탑의 건립 연대를 기록한 금판인 사리봉영기가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639년 백제 무왕 재위 시기에 석탑을 축조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 석탑과 국립익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러 유물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사진으로 담아 보았습니다.

 

 

 

석탑의 모습입니다.

백제 무왕은, 선화공주와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서동요'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백제의 임금입니다. 하지만 출토된 사리봉영기의 기록에 의하면,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당시 백제 최고의 귀족이었던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왕후로

기록되어 있었고, 그 왕후가 임금에게 부탁해 미륵사를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백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라는

기정사실화된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 기록으로 한동안 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뒤로 여러 추측들이 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재해석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서동요의 이야기가 허구인지에 관해선 아직도 여전히 역사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국립익산박물관에 들러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와 사리봉영기를 둘러 보기로 합니다.

박물관에는 출토 당시의 모습을 복제품과 함께 복원해 놓은 모형도 전시되어 있더군요.

움푹 파여 있는 사리공의 크기는 가로 X 세로가 모두 25cm, 깊이가 26.5cm라고 합니다.

 

 

 

사리공을 채우고 있던 유리구슬과 바닥에 깔려 있던 초록색 유리판의 모습입니다.

유리구슬은 원래 귀한 비단을 깔아 구분하였지만 비단이 삭으면서 무너져 내려

뒤섞였을 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바닥에 깔려 있던 초록색 유리판의 두께는 1cm정도로 두툼한 편인데

바닥에 깔면, 각각의 변의 길이가 25cm가 되는 정육면체의 공간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정확히 계산된 공간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사리공의 바닥에 깔려 있던 유리구슬을 한 곳에 모아둔 모습입니다.

 

 

 

사리봉영기의 모습입니다.

크기는 가로 15.3cm, 세로 10.3cm 이며 두께는 1cm 정도라고 합니다.

앞면 99자, 뒷면 94자, 전체 193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옮겨 적습니다.

-------------------------------------------------------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고 때에 이르러
깨달음에 이르신 뒤 중생의 부름에 응하시어
세상에 설법을 펼치심은 마치 물 속에 비친 달과 같이
중생의 마음을 어루만지셨다.

법왕께서는 왕궁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斛)의 사리를 남겨 중생들과 삼천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시니 모든 이들이 따르고 불법에 귀의하였다.

깨달음에 이르신 뒤
몸으로 찬란히 빛나는 오색 광채를 뿜으시며
7일씩 7번의 선정에 드시면서 보여준 그 신통한 변화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서
지극히 오랜 세월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今生)에 뛰어난 과보를 받으셨다.
만백성을 잘 돌보고 사랑하심으로 불법을
몸소 실천하셨으니 삼보의 동량이 되셨다.
그런 까닭으로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 하셨다.

원하옵건대 공양의 은덕이 대대로 이어져서
영원토록 다함이  없기를 바라오며,
항상 선한 마음으로 선한 일을 몸소 실천하시니
우러러 바라옵건대, 그 은덕으로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부처님의 진리를 널리 펴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대,
왕후의 몸과 마음은 수경(水鏡)처럼 맑고 깨끗하게
법계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불법을 꿰뚫는 지혜로 성불에 이르시어,
빛도 모양도 없이 언제나 온세상을 감싸고 있는 허공처럼
그 은덕 또한 오래토록 불멸하소서.
그리하여 자손대대로 그 복을 누리게 하시고
무릇 마음을 다하여 모든 중생과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


---------------------------------------------------------

 

 

 

사리공에서 출토된 사리외호의 모습입니다.

정식명칭은 금동제사리외호로, 사리공의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사리외호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높이가 13cm 정도이며

세 잎의 꽃송이를 부드러운 줄기가 휘감아 가는 문양(연화당초문)과 사이사이 작은 원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안에는 3,892알의 유리구슬과 48알의 금구슬, 그리고 자수정 50알 속에

작은 호(금제사리내호)가 하나 더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금동제사리외호 안에 들어 있었던 구슬들을 모아둔 모습입니다.

 

 

 

사리외호 안에 들어 있었던 사리내호의 모습입니다.

정식 명칭은 금제사리내호이며, 높이는 사리외호의 반 정도에 불과한 작은 크기였습니다.

순금으로 만들어 청동 위에 금박을 입힌 사리외호보다 훨씬 더 반짝거리며, 사리내호 속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작은 유리병과 유리구슬이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사리내호에 들어 있었던 유리병의 모습입니다.

원래 모습은 뚜껑만 남아 있고 유리는 아주 작은 파편으로 산산조각이 나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현재 전시되고 있는 유리병은 복원품이라고 합니다.

사리함은 유리병 안에 진신사리를 넣고 순금내호, 금동외호로 이어지는 삼중의

용기로 감싼 뒤, 다시 거대한 석탑의 심주석에 모셨으니 당시 백제 왕실과

귀족들이 부처님의 사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예전 사진으로, 사리내호와 유리병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던 모습입니다.

사리내호가 약 6cm 정도의 크기이니 유리병의 크기는 대략 3cm에 못 미치는

아주 작은 크기로 보였습니다.

 

 

 

사리공 바닥에 놓인 유리판 위에는 5개의 둥근 청동합이 마치 사리호를

에워싸듯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청동합에는 각기 다른 내용물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유리와 금, 호박과 마노처럼 귀한 광물을 가득 담은 합이 있는가 하면 귀한 약재나

향목(香木)을 천에 감싸서 넣은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들어 있었던 당시에는 가장 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이 들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라고 합니다.

 

 

 

청동합에 들어 있었던 유리구슬과 여러 진귀한 광물들을 가깝게 찍어본 것입니다.

 

 

 

청동합의 모습입니다.

 

 

 

이 금판들은 공양자의 이름들이 적혀 있는 금판이라고 합니다.

당시 화폐를 대신하던 금판에는 여러 관직을 가진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백제 왕실과 함께 다양한 지위의 관료들이 모두 한 뜻으로 사리와 보물을

공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미륵사지와 국립익산박물관을 다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