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에서~(1)

2010. 12. 6. 07:38박물관.문화재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한바퀴를 돌아보는 등산을 하기로 한 뒤,

시내버스를 타고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그야말로 꼬불꼬불 산길이었다.

성남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 산길을 한참을 오르던 버스는

성벽 아래를 관통한 터널을 지난 뒤에 나를 내려 주었다.

호기심에 찾아와 보긴했지만 날씨는 춥고 가을 황사가 하늘을

뿌옇게 물들이고 있었다. 잠시 고민이 일었다.

그러나 이왕 찾아온 길, 남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비석군이었다.

모두 조선후기때의 비석으로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푼 지방 관리들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였는데, 원래 이 자리에 있던 19기와 행궁을 복원하면서

옮겨온 11기 까지 모두 30기의 비석이 모여있다고 했다.

 

 

 

 

주차장을 따라 걸으니 곧 남문이 눈에 들어왔다.

옛 성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는 웅장한 모습이었다.

 

 

 

 

성문을 나선 뒤 입구에서 다시 바라본 남문~

남한산성의 4대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라고 했다.

정조 3년 무렵에 개축을 하면서 지화문(至和門)이라 이름 붙였으며

지금의 문루는 1976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남문을 지나 드디어 성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남문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병자호란때에 강화도로 피신을 가려던 인조가 청군에 막혀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바로 이 남문을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인조의 고난을 고스란히 바라본 성문인 셈이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 성벽이 보였다.

복원공사를 거친 탓인지 비교적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성곽 주변에 마련된 쉼터~

등산도 즐기고 역사도 탐방할 수 있는 의미있는 곳이었다.

 

 

 

 

성곽을 따라 걷는데 성벽 가운데로 뚫려있는 암문이 보였다.

 

 

 

 

<제7암문>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암문은 일종의 비밀통로와 같은 것으로, 적이 쉽게 식별할 수 없도록

다른 시설을 설치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남한산성에 있는 여러개의 암문중에서 이 암문이 가장 이용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을 한다고 했다.

 

 

 

 

암문을 벗어나서 바라본 성벽의 모습~

이 가파르고 높은 산 위에 어떻게 이렇게 큰 규모의 석성을 쌓을 수 있었는지

새삼 놀라움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남한산성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시대 인조임금때이지만

삼국시대부터 남한산성은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고 한다.

백제 시조인 온조왕의 왕성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신라 문무왕때에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쌓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바깥으로 불쑥 튀어나온 성벽이 보였다.

 

 

 

 

원래 성벽에서 바깥으로 'ㄷ'자 형태로 넓게 돌출되어 있었다.

제2남옹성치였다. 치는 성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중의 하나라고 한다.

다섯개의 치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옹성치 너머엔 현재 복원중인 제2남옹성도 보였다.

옹성은 원래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밖으로 한겹 더 둘러싼 성벽을 말하는 것이지만,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특이한 형태라고 했다.

여러 방면에서 적을 공격하면서 성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되었으며, 둘레가 318미터로 역시 규모가 가장 크다고 했다.

 

 

 

 

그리고 옹성 입구에 있는 건물터~

<남장대>터였다. 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해 지은 건물로 남한산성안에는

다섯개의 장대가 있었다고 한다. 대체로 성밖을 멀리 조망할 수 있는 지형을

갖춘 곳에 장대를 설치했으며, 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 소속의 5영중

전영장을 지휘하던 장대였다고 한다.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였다고 한다.

광해군이 개축을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폐위된 뒤에, 이괄의 난을 겪은

인조임금이 유사시 도성을 방어하고 왕이 피신할 수 있는 거처로서 남한산성을

개축하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무렵엔 후금(청나라)의 성장과 함께

조선을 향한 군사적 위협이 팽배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멀리 산 중턱에 자리한 망월사가 보였다.

남한산성내의 아홉개 사찰중 가장 오래된 사찰이며, 건물옆으로

2001년에 설립했다는 13층 적멸보궁탑이 바라다 보였다.

 

 

 

 

성곽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건너편 산중턱으로 이어진 성벽의 모습이 보였다.

현재 남한산성은 성벽은 국가 사적 57호로 지정되어 있고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된 성벽을 1975년부터 1997년에 걸쳐 성벽 5.1킬로를 복원했다고 한다.

2010년에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기도 했다고 한다.

 

 

 

 

동문의 모습이 내려다 보였다.

동문옆으로는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도로가 나있었다.

 

 

 

 

좌익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으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성문이라고 했다. 문루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다.

 

 

 

 

동문을 지나온 뒤 되돌아본 성벽의 모습~

길게 띠를 두른 모습이다.

 

 

 

 

남한산성은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이다.

성벽 바깥은 경사가 심한 비탈이어서 적군들이 기어 올라와 성을 공격하기가

좀체 어려웠을 것이다. 청량산과 남한산을 이어서 쌓은 성은 계곡이 깊고

험해서 적의 접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조가 10만이 넘는 청나라의 대군을 맞아 무려 45일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남한산성의 지형적 이점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성벽과 인접한 바위위엔 황진이에 얽힌 송암정터가 있었다.

저 바위 위 평평한 곳에 정자가 있었던 모양으로, 안내판에 적힌 설명에 따르면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곳을 지날 때에 마침 기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사내들 중, 술이 취한 사내 하나가 황진이의 미모에 반해 희롱을 하였다고 한다.

황진이가 개의치않고 불법을 설파하자,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바위 아래로

뛰어 내려 자결을 하였는데 그후 달 밝은 밤이면 이곳에서 노래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바위 위의 고사된 소나무는 여주 능행길에 정조임금이 <대부> 벼슬을 내린

대부송이라고 했다. 

 

 

 

 

남한산성은 산허리를 돌고 돌아 끝이 없을 듯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한산성 건축에는 당시의 승려들이 꽤 많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전국의 사찰에서 차출되어 산성 내 9개의 사찰에 머물면서 산성의 수성과 보수,

그리고 군사적 임무를 다해야 했다고 한다.

 

 

 

 

문득 성곽 너머로 넓고 둥근 형태의 옹성이 보였다.

<장경사신지옹성>이었다. 둘레가 159미터로 옹성의 끝에는 대포를 쏠 수 있는

2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옹성의 끝에서 바라본 남한산성의 성벽~

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우뚝 서 있었다.

 

 

 

 

장경사신지옹성과 본성을 잇는 문인 <제2암문>~

다른 암문들은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들었지만

제6암문과 함께 평평한 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옹성을 지나오자, 제법 가파른 산길이 이어졌다.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산성길을 따라 오르고 있었다.

 

 

 

 

그 길목에서 만난 유적지 하나~

<군포지>라고 했다.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터로 남한산성내에

이런 건물이 125개나 있었다고 한다.

조망이 좋은 곳에 이런 초소들을 설치하고 성 바깥의 동태를 살폈을 것이다.

 

 

 

 

군포지를 지나오자, 또 다른 건물터가 보였다.

<동장대터>였는데, 남장대와 마찬가지로 지휘와 관측을 목적으로 지어진 누각이라고 했다.

수어청 소속의 5영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으로, 이 곳에선 하남시와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일만큼 조망이 좋은 곳이었다.

 

 

 

 

동장대터 아래에 있는 <제3암문>~

성밖에서 찍어 본 모습이다.

 

 

 

 

암문을 벗어나자, 또 다른 암문이 보였다.

봉암성으로 통하는 암문이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외성으로 숙종임금때에

축조된 성이라고 했다. 옹성처럼 남한산성에 덧붙여 쌓은 성이며

병자호란 당시에 남한산성의 내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게 점령당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쌓은 성이라고 했다.

내친 김에 잠시 봉암성도 구경해 보기로 했다.

 

 

 

 

성벽은 옛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듯 했다.

다만 군데군데 허물어지거나 성곽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들도 있었다.

 

 

 

 

봉암성은 아직 보수 계획이 없는 듯, 성벽위의 방어시설인 성가퀴(여장이라고도 함)가

대부분 허물어지거나 많이 훼손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벌봉의 제13암문을 만났다.

암문밖을 나가보니 왼편으로 이어진 성벽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었다.

 

 

 

 

벌봉 정상을 향해 지어진 성벽~

많이 허물어진듯 보였지만 그래도 성가퀴의 형태는 남아 있었다.

 

 

 

 

벌봉의 정상인 바위~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고 해서 벌봉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청 태종이 정기가 서려있는 바위를 깨뜨려야 산성을 함락 시킬 수 있다고 해서

바위를 깨뜨렸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성안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데,

병자호란 때에 이 곳을 뺏긴 후로 성안의 동태가 적에게 노출되어 많은

곤란을 겪었다고 하며,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꺼져가는 불씨와도 같았던 명나라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던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펼치지 못하고 명분에 사로잡혀 <친명배금> 정책을 버리지 못한 것이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인 전쟁을 불러오게 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쿠데타로 광해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임금~

두번의 호란을 겪으면서 급기야 추위가 몰아치는 남한산성에서

청군에게 포위 당한 채 힘겨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 왕위에 오른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봉암성을 돌아나오면서 문득 당시 인조임금의 마음이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