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령포와 장릉에서 단종임금을 뵙고~!

2012. 7. 3. 08:41박물관.문화재

 

 

주말을 맞이해서 단종임금의 애사(哀史)가 깃들어 있는 영월을 찾아 보았다.

숙부였던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17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던 단종임금~

그 단종애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은 것이 영월을 찾은 이유였다.

먼저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청령포로 들어가는 입구는 지금 한창 새단장중이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선착장도 새롭게 단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청령포 앞을 흐르고 있는 냇가는 서강으로,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흡사 강으로 둘러싸인 섬처럼 느껴졌다.

 

 

 

배를 타고 건너편 강가에 닿으니 관광객들이 쌓아 놓은 듯한

여러 개의 돌탑들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강변을 지나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들어서고, 나무들 사이로

기와집과 초가집 한 채가 바라다 보였다.

 

 

 


기와집은 단종임금이 유배시 머물렀던 '단종어소'였다.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방안에는 단종의 모습을 표현한 밀랍인형이 놓여져 있었다.

 

 

 

 

단종임금에게 예를 올리고 있는 선비의 모습도 있었고~

 

 

 

 

어소 처마 아래에 걸려있는 시 한 편~

단종임금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그 내용이 사뭇 슬프다.

 

 

 

 

단종어소 마당에는 '단종유지비각'이 있었다.

비석엔 영조임금의 친필로 이곳이 단종이 계실 때의 옛터임을 밝히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담장을 넘어와 마당으로 길게 몸을 드리우고 있는

특이한 모양의 소나무 한 그루~

 

 

 

 

이 소나무가 어떻게 이렇게 자라게 되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옛 충신들의 넋이라도 깃든 것일까...!

 

 

 

 

단종어소 담장 밖에는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이 초가는 당시 단종임금의 시중을 들던 궁녀와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라고 한다.

 

 

 

 

당시 궁녀들의 모습도 인형으로 방안에 놓여져 있었다.

이 궁녀는 바느질하고 있는 궁녀의 모습이며~

 

 

 

 

이 궁녀는 다듬이질을 하고 있는 궁녀의 모습이다.

 

 

 

 

행랑채 앞에 놓여있는 장독들~

 

 

 

 

단종어소 주변은 온통 울창한 소나무숲이었다.

이곳 청령포는 현재 국가지정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숲에서 바라본 단종어소~

조선의 6대 왕인 단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다가 성삼문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들의

복위 사건 이후에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이곳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 위에 누군가 쌓아둔 작은 돌탑~

 

 

 

 

이 소나무는 관음송으로,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라고 한다.

수령은 약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고, 현재 천연기념물 349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 때에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 사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관음송이란 이름은 단종의 유배 당시의 모습을

보았다는 뜻의 관(觀), 때로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뜻의 음(音)을 써서

관음송이라 불리운다고 한다.

 

 

 

청령포는 단종어소에서 사방 어디를 걸어도 채 100보도 되지 않을만큼의

좁은 곳이었다. 삼면이 물로 둘러 싸이고 뒷편은 험준한 암벽으로 막혀있는

그야말로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단종임금에겐 한없이 답답하고 외로운 공간이었을 것이다.

 

 

 

관음송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오르니 작은 돌탑 하나가 보였다.

망향탑이었다. 단종임금이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정순왕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돌들을 주워 쌓은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라고 한다.

 

 

 

망향탑을 지나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령포 뒷편의 풍경~

오르기 힘든 가파른 봉우리와 서강과 맞닿은 곳은 깍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노산대로 향하는 길~

 

 

 

 

노산대는 서강 너머의 풍경을 훤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그다지 규모가 크지않은 바위로, 단종이 해질무렵이면 이 바위에 앉아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이라고 한다.

 

 

 

노산대에서 다시 바라본 서강의 풍경~

저 서강에 비친 노을을 바라보던 단종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기도 했을 것이다.

 

 

 

노산대를 내려오자, 숲속에 비석 하나가 보였다.

금표비라고 했다.

 

 

 

비석 뒷편에 새겨진 < 청령포금표 >라는 글자~

이곳이 단종임금이 유배되어 계시던 곳이므로 일반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뜻의 비석으로, 영조임금때에 세웠다고 한다.

 

 

 

청령포를 돌아나오며 다시 바라본 신기한 모양의 소나무~

어소를 향해 절을 하고 있는 듯한 모양이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머문 기간은 두 달 남짓이라고 한다.

뜻하지 않은 홍수로 거처를 영월 동헌의 객사였던 관풍헌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역시 숙부인 금성대군의 복위 사건이 일어나면서

결국 17세의 어린 나이로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고 한다.

청령포는 바로 단종애사가 시작된 첫번째 장소였던 셈이다.

 

단종어소를 둘러싼 커다란 소나무들은 빽빽한 울타리가 되어

단종의 발길을 막았을 것이고, 청령포를 에워싸고 흐르는 서강의 강물은

막막한 체념과 두려움이 되어 단종의 마음을 짓눌렀을 것이다.

청령포를 돌아보는 동안 슬픔으로 여위었을 어린 단종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옛이야기처럼 여기고 있었던 역사의 한 부분이

비로소 현실인양 또렷이 내 머리속에 새겨지고 있었다.

 

청령포를 돌아본 뒤, 단종임금의 무덤이 있는 장릉으로 향했다.

그리고 계획에 없었던 관풍헌도 찾아볼 것을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단종임금이 사약을 받고 목숨을 거둔 장소이니 어느 곳보다도

더 역사적인 장소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장릉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 박충원 낙촌비각 >이 보였다.

 

 

 

 

이 비각은 1973년에 박충원의 충신됨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중종 11년에 노산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해서 단종의 무덤을 찾긴 했으나

방치되고 있던 것을, 중종 36년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이 능을 봉축하고

제사를 지낸 것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라고 한다.

 

 

 

장릉으로 오르는 길~

소나무 그늘 사이로 이어진 좁은 길이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장릉~

 

 

 

 

단종 사후에 조성된 능이 아니라 후대에 능호를 받기전에 조성된

능이어서 그런지 다른 왕릉에 비해서 무척이나 초라한 느낌이었다.

능의 병풍석도 난간도 없고 무인석도 없이 문인석만 서있을 뿐이었다.

숙종임금 때에 와서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고 장릉으로 추봉되기 까지는

왕의 무덤이 아니라 노산묘로 조성이 되었으니 규모가 작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장릉을 바라보고 있는동안 역사학회라는 명찰을 가슴에 부착한

스무명 정도의 노인분들이 장릉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모자를 벗고 장릉을 향해 네 번 목례를 올리며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장릉으로 오르는 길 옆에 서있는 정령송(精靈松)이라는 이름의 소나무 한 그루~

1999년에 사릉에서 이전 식수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사릉은 단종임금의 왕비였던 정순왕후의 릉으로, 남양주시에 있다.

평생을 슬픔과 외로움으로 살았을 정순왕후를 위해, 이제라도 지척에서

단종을 바라볼 수 있도록 상징적으로 옮겨 심은 나무인듯 보였다.

 

 

 

장릉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여러 비각들~

단종임금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궁중에 어른들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던

고립무원의 처지였다고 한다. 대비도 왕비도 없이 의지할 곳 하나 없었던

12살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마 어머니인 대비나 할머니인 왕대비라도 살아있었다면 단종 애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부왕이었던 문종의 고명(임금이 신하에게 남기는 유언)을 받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신권이 득세를 하고 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수양대군의 틈바구니속에서

어린 단종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구중궁궐의 높은 담장 안에서 밤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눈물을 삼키진 않았을까...!

 

 

 

장릉을 뒤로 하고 정자각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정자각 입구에 서있는 홍살문~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정자각의 모습~ 뒷편 언덕 위로 장릉의 모습이 보인다.

능에 제향을 올릴때 왕의 신주를 모시는 건물로, 정(丁)자 모양으로 지어서

정자각으로 불린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조선의 왕릉을 보면 능과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지어져 있는데

이곳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조성된 곳이 아니어서 그런지, 왕릉의 측면을

바라보며 지어져 있었다.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돌로 만들어진 길은 참도인데,

좌측 조금 높게 만들어진 길은 신도로 신(神)의 길이며 우측 낮은 길은 어도로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고 했다.

 

 

 

영천이라는 이름의 우물~

정조임금 때에 어명으로 만들어진 우물로, 한식때에 제사를 지내는

우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자각 앞에서 다시 바라본 여러 비각들~

 

 

 

 

이 비각은 '단종비각'으로, 영조 9년에 어명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비석엔 < 조선국단종대왕장릉 >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엔 단종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비각은 '장판옥'으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단종을 보필했던

모든 사람들의 합동 위패를 모셔놓은 비각이라고 한다.

 

 

 

 

이 비각은 < 엄흥도 정여각 >으로, 사약을 받고 강물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이곳 장릉에 안장한 충신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라고 한다.

당시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였다고 한다.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떤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고 말하며

단종의 시신을 영월 엄씨들의 선산인 동을지산(현재의 장릉)에 몰래 매장하고

벼슬을 내놓은 뒤, 아들과 함께 숨어 살았다고 한다.

후세에 길이 추앙받아 마땅한 충신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팻말을 보니 제실이었다.

 

 

 

 

매년 단종 제향을 지낼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및 각종 사용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라고 한다.

 

 

 

1997~1998년에 제실의 지붕과 배수로 등을 정비하였다고 한다.

 

 

 

 

제실을 나와 다시 바라본 정여각~

후에 엄흥도는 그 충절이 알려져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종때는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장릉엔 연못도 있었다.

 

 

 

 

연못엔 수련이 한창이었다.

 

 

 

 

장릉을 돌아나오며 문득 이런 생각에 잠겼다.

가끔은 역사를 바꾸어 생각해 볼 필요도 있는 것이다.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켰던 사육신은 후세에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지만

만약 그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역사에 순응하며 살았다면, 단종 역시 유배되는 일 없이

상왕으로 무난히 여생을 보내며 살지 않았을까......

 

 

 

숙부였던 금성대군 역시 복위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단종임금에게

이런 비극적인 죽음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유배지를 벗어나진 못했더라도

죽음이 그렇게 빨리 찾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연이은 복위 사건으로 형제마저 죽음에 이르게 한 세조는 아마 그 화근인

단종을 죽임으로서 더 이상의 피를 보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충신이 되었지만 비극의 몫은 고스란히 단종이 떠안게 된 것이다.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 역시 절박했을 것이다.

조선이 개국하고 왕은 5대를 거쳐갔지만 역사는 겨우 60년 남짓이었고

아직 완전히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고 볼 수 없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올라 신하들에게 권력을

휘둘리고 있었으니, 왕족으로서 이러다가 나라마저 신하들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닐까하는 불안감과 함께 자신의 목숨조차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어쩌면 그 불안감과 두려움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왕위찬탈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장릉을 돌아 본 뒤 마지막 목적지였던 관풍헌으로 향했다.

단종임금이 마지막으로 머물면서 사약을 받고 승하했다는 바로 그 장소였다.

 

 

 

관풍헌의 건물은 영월 읍내에 있었다.

옛 동헌의 객사로 쓰이던 건물인데, 청령포에 홍수가 난 후

단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관풍헌 앞에 있는 자규루~

단종이 이 누각에 올라 신세를 한탄하면서 자규시및 자규사를 지었다고 해서

원래 매죽루였던 이름을 자규루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자규시를 옮겨 적는다.

 

자규시(子規詩)

 

원통한 새 한 마리가 궁중을 나오니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누나

밤은 오는데 잠들 수가 없고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

새벽 산에 울음소리 끊어지고 달이 흰 빛을 잃어 가면

피 흐르는 봄 골짜기에 떨어진 꽃만 붉겠구나

하늘은 귀먹어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서러운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아지는가

 

 

 

결국 단종임금은 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서인으로 강등된 뒤

금부도사 왕방연이 들고온 사약을 마시고 1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고 한다.

이 관풍헌의 마당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을 것이다.

유배길에 오른지 4개월여만의 일이었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스스로 바퀴를 굴리지 못하고 수레에 의지한 채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임금 단종~

다만 후세에 나마 이렇게 그 역사의 흔적을 찾으며 단종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 넋엔 위로가 되진 않을까......!

 

마지막으로 단종께 사약을 올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읊었다는 왕방연의 시조를 적는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