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에서~(2)

2010. 12. 6. 08:33박물관.문화재

 

봉암성을 걸어나와 다시 제3 암문으로 들어와서 성곽을 따라  북문을 향해 걸었다.

성곽을 따라 걷는 동안 성벽 너머로는 하남시와 한강은 물론

그 너머 남양주 덕소까지 훤히 내려다 보였다.

산성내 행궁터를 발굴하면서 커다란 기와가 함께 출토된적이 있었는데,

고증을 통해 밝혀진 바로는 산성내에 아주 규모가 큰 신라의 무기고가 있었고

그 무기고의 지붕으로 쓰였던 기와였다고 한다.

한강유역을 통해 서해로의 진출을 꿈꾸었던 신라에게는 이 남한산성이

상당히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곽은 가파른 비탈길로 이어졌다.

성곽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듯한 느낌이었다.

 

 

 

 

내려와서 되돌아보니 제법 길고 가파른 비탈이었다.

이 비탈을 따라 성을 쌓는 일은 그야말로 무척 힘들고 어려운 난공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병사들도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성벽 아래로 작은 암문이 보였다.

 

 

 

 

제4 암문이었는데 이곳을 통해 1킬로 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창동에 이른다고 한다.

 

 

 

 

비밀 통로로 쓰였던 암문답게 통로는 작고 좁은 편이었다.

암문 마다엔 성문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성벽 중간에 설치된 수문~

어쩌면 당시엔 이 성을 쌓는 일이 최고의 건축술을 요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성곽은 소나무 그늘을 따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치욕적인 역사의 흔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것 처럼 보였다.

1636년 음력 12월2일, 청태종은 12만8천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드디어 조선 침략을 감행하였다. 누루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청나라가 자신들의 요구를 묵살한 조선에 대한 보복성 침략이었다.

 

 

 

 

청군은 임경업이 굳게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을 피해 한양으로 곧장 진격을 했다.

우수한 기동력을 자랑하던 청의 기병은 10일만에 한양 부근에 이르렀는데

조선 조정은 겨우 하루전에야 청군의 침략 사실을 보고 받았다고 한다.

부랴부랴 두 왕자와 비빈, 종실들을 강화도로 피난보내고 인조 자신도 소현세자와

문무백관과 함께 강화도 피난길에 올랐으나, 이미 청군이 길을 막은 뒤였다.

 

 

 

 

어쩔 수 없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군의 포위속에 고립된 남한산성은 겨우 50일 정도의 식량밖에 없었다고 한다.

45일 정도가 지날 무렵 성내의 군사들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기력을 잃었고

강화도로 피신을 갔던 왕자들 마저 청군의 포로가 되자, 인조는 어쩔 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1월30일, 결국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청태종에게 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절하는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르면서 47일간의 항쟁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가 인질로 잡혀가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가 되거나

잡혀가서 곤욕을 치렀으며, 끝까지 항복을 반대했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은

심양으로 끌려가 참형을 당했다고 한다.

 

 

 

 

전쟁에 패하고 난 후에 군신의 예의로 조공을 바치는 굴욕을 치러야 했던 조선...

이 남한산성은 당시 그 치욕의 역사를 함께한 비운의 산성이었다.

사방에서 청군의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내려다 보며, 추위와 배고픔과

두려움을 견뎌내야 했던 병사들의 애환은 또 어떠했을까...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소나무들만 무심히 성벽 너머로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성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하남시 전경~

한강 너머 아파트가 들어선 곳은 남양주시 와부읍으로 덕소라고 불리는 곳이다.

아마 저 아래 벌판도 병자호란 당시엔 청군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북문이 보였다.

이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300여명의 군사가 성문을 열고 나가

청군을 기습 공격했지만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만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병자호란 당시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고 한다.

 

 

 

 

정조임금 3년에 이 문을 개축할 당시에 <전승문>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그때의 패배를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성곽은 북문을 지나면서 다시 오르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호젓한 산길을 걷는 듯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연주봉의 모습~ 아쉽게도 연주봉 옹성은 보수 공사로 인해 구경할 수가 없었다.

남한산성의 옹성중, 특이하면서도 멋진 경관을 뽐내는 곳이라고 한다.

 

 

 

연주봉 옹성의 모습~ (퍼온 사진이다)

 

 

 

 

이 곳은 매탄터로, 숯을 묻어두거나 만들던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매탄터 주변 성벽 아래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이 성벽에 서 있으니 남한산성의 지리적 중요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강과 아차산, 송파구 일대와 멀리 북한산의 모습까지 훤히 내려다 보였는데,

한강유역을 두고 다투던 삼국시대엔 이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조금 더 걸어 내려간 곳에서 드디어 서문을 만났다.

우익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이 문을 통해

항복을 하러 나간,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성문이기도 했다.

 

 

 

 

청태종은 인조에게, 항복을 하러 나오는 주제에 성의 정문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인조는 용포를 벗고 민갓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이 서문을 나섰다고 한다. 밤에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항복을 하러가는

인조의 심정은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을 것이다.

서문은 그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채로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서문을 벗어나 바라본 남한산성의 성벽~

다만 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서문을 지나 이제 출발지였던 남문을 향해 가는 길~

약 1킬로 정도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이 바위는 <병암남성신수비>로 정조 3년 성을 보수할 당시에 투입되었던

비용의 내역과 책임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바위라고 했다.

요즘으로 보자면 건축실명제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성곽을 따라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햇살이 쨍쨍했지만 날씨는 여전히 춥고 바람은 쌩쌩 불었다.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손이 시리고 얼얼해졌다.

 

 

 

 

병자호란이 발발한 음력 12월경은 요즘으로 보면 1월에 가까웠으니

한겨울이었을 것이다. 해발 400미터가 넘는 산성은 바람도 많이 불고

산 아래에 비해서 훨씬 더 추웠을 것이다. 적과의 대치 상태였으니

병사들은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지도, 잠도 편히 잘 수 없었을 것이며,

배고픔과 추위를 견뎌내야 하는 말할 수 없이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각지에서 임금을 구하기 위해 진격했던 관군과 의병들도

모두 청군에게 패하고 말았으니......

 

 

 

 

이 건물은 <수어장대>로 산성의 5개 장대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원래 이름은 서장대였는데 영조때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지으면서 수어장대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다섯개의 장대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했다고 한다.

 

 

 

 

수어3장대의 오른편 울타리 끝에 있는 매바위~

이곳은 당시 남한산성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서 억울한 모함으로

죽임을 당한 이회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아마 이회는 꼼꼼하고 책임감이 지나치게 강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산성 건축의 책임을 맡겼는데 너무 일을 꼼꼼히 처리한 나머지

다른 구역보다 진도가 느리고 그러다보니 경비도 미리 바닥이 난 모양이었다.

결국 조정에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어떤 사람이

모함을 하기를 이회가 주색잡기에 빠져서 공사비를 모두 탕진해 버렸다고

밀고를 한 모양이었다.

결국 이회는 참수형을 당했는데, 죽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죄가 있다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요, 죄가 없다면 반드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회가 죽자, 매 한마리가 날아와 이 바위위에서 슬피 울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곳은 이회와 그의 부인 송씨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인 <청량당>이다.

수어장대 좌측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회의 부인 송씨는 남편의 죽음이 알려지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강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한다.

후에 이회의 누명이 벗겨지면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청량당을 지었다고 한다.

 

 

 

 

성벽은 이런저런 역사를 간직한채 산허리를 따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되돌아 보니 커다란 노송 한 그루가 병사인양 성벽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성벽을 따라 걷는데 또 다른 암문이 보였다.

<제6 암문>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15년 1월23일,

암문을 향해 쳐들어온 청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고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고 부른다고 했다.

산성 유적지에는 어느 곳 하나 사연을 간직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중원을 점령하고 다스렸던

금나라의 시조 아골타는 성씨가 김씨였다고 한다.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에는 아골타의 조상을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라고

적고 있는데, 신라가 망한 이후에 씨족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한 김씨 성의

신라인이 바로 아골타의 조상이라는 것이었다.

 

 

 

 

아골타 역시도 고려는 선조들이 나온 부모의 나라라고 칭하면서

고려에 대한 적대행위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약 120여년에 걸쳐 중원을 호령했던 금나라의 조상은 김씨 성을 가지고

한반도에서 이주한 신라의 후예였던 것이다.

 

 

 

 

청의 태조 누루하치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였다.

만주어인 '아이신줘러'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으로, 만주어 그대로

번역을 하면 <김씨집안> 또는 <김씨 부락의 사람들>이란 뜻이 된다고 한다.

금나라가 망한 뒤, 몇백년이 지나 다시 중국땅을 지배하게 된

청나라의 황제들도 결국은 모두 김씨의 후손들이었던 셈이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조선을 침략했던 청태종도 조선이 자신의

조상이 태어나고 자란 '부모의 나라'였다는 것을 알고나 있었을까...?

어쨌든 한반도에서 이주한 김씨의 후손들이 만주 벌판에서 두번이나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고 중원을 지배한 사실은 분명 놀라운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이 팔각정은 원래 남문 밖에 있던 것을 조망이 좋은 이 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했다.

 

 

 

 

성벽은 산비탈을 따라 남문을 향해 계속 이어져 있었다.

 

 

 

    

 

성가퀴(여장)위에서 자라고 있는 잡초들......

실제 성가퀴는 높이가 있는 편이어서, 성안에서는 공격이 용이하지만

밖에서는 성 안의 군사들을 공격하기 어려운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만약 보급로만 확보되었더라면 쉽게 청군에게 항복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출발지였던 남문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남문앞의 커다란 느티나무들은 성문을 은폐하거나 또는 호우시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여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심어둔 것이라고도 했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약 12킬로에 이른다고 한다.

성곽을 따라 등산을 하기 위해 찾아왔던 곳에서 역사의 한 부분을

깊숙히 들여다보는 계기를 갖게 된 것이었다.

등산객중에는 일일이 안내판을 들여다보며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한산성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 역사의 현장을 세밀히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일깨워 준다.

자랑스런 역사는 자긍심을 주지만 뼈아픈 역사는 그 자긍심에

상처를 남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뼈아픈 역사를 교훈 삼아 다시 우리의 자긍심을 되찾는 일일 것이다.

그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남한산성은 생생히 살아 숨쉬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렇게 남한산성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