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에서~(3)

2010. 12. 8. 07:43박물관.문화재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내려 오는데

건너편 솔숲 아래로 행궁이 보였다.

행궁은 임금이 도성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남한산성 행궁은

외침이 있거나 내란이 있을 때에 지방에서 후원군이 올때까지

도피처나 보장처로 사용하기 위해 인조4년에 지었다고 한다.

인조임금은 아마 청군의 외침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산성안에

행궁까지 마련한 것은 아니었을까...

천천히 성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행궁은 일제강점기 동안 방치되어 허물어진 것을 1999년부터 2010년까지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진 아래의 기와집들은 산성내의 음식점들이다.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의 전경~

복원 후 아직 단청을 칠하지 않아서 인지 행궁이라기보다는

어느 양반가의 저택같은 느낌이었다.

 

 

 

 

행궁이다보니 비교적 소박하고 규모도 그다지 커보이지 않았다.

현재 임시개방중이었는데 개별 입장은 불가였고 정해진 시간에 따라

문화해설사를 동반한 입장만 가능할뿐이었다.

 

 

 

 

다행히 관리사무소 뒷편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담 너머로

행궁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행궁의 여러 전각들~

단청 작업이 끝나면 훨씬 더 근사한 모습이 될것이다.

 

 

 

 

행궁을 뒤에서 바라본 모습~

전각 뒷편의 넓은 공간은 행궁의 후원(後苑)이었다.

 

 

 

 

좌측 큰 건물이 내행전으로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며

우측 느티나무 아래의 건물은 남행각이라고 한다.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내행전과 남행각~

남행각 담장 너머의 느티나무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의

설화가 어린 나무라고 한다.

 

 

 

 

후원에 세워져 있는 정자와 그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좌전이다.

 

 

 

 

좌전의 전체 모습~

숙종임금때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유사시 행궁으로 피신을 할때 종묘도 함께 옮겨올 수 있도록 지은 건물인듯 했다.

 

 

 

 

관리사무소 뒷편에 있는 침괘정~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는데, 온돌과 마루방, 툇마루등과 같은

건물 구조로 봐선 집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을 한다고 한다.

 

 

 

 

그 침괘정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수령을 보자면 산성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일듯도 싶었다.

 

 

 

 

침괘정을 지나 산으로 오르니 숭렬전이 보였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장군의

영혼을 함께 모신 사당이라고 했다.

 

 

 

 

사당이 세워진 계기로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임금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청군의 기습 사실을 알려주었고 이를 기리기 위해 이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꿈에 온조왕이 다시 나타나 충직한 신하 한명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다음 날 이서장군이 병사하였다고 한다.

 

 

 

 

인조임금은 필시 온조왕이 이서장군을 데려갔다고 생각해서

사당에 함께 모시도록 했다고 한다.

숭렬전 역시 문이 잠겨져 있어서 담 너머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남한산성 역사관에는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전하는 일화가 적혀 있었다.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때 눈길에서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으로

피신을 시킨 나무꾼 서흔남의 일화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을 전하는 일화~

아무 희망도 없었던 인조임금과 병사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느티나무위에 집을 짓고 있는 까치를 보며 그나마 위로를 삼았다는 일화였다.

당시의 절박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저 느티나무는 행궁의 남행각옆에 서 있었다.

 

 

 

 

연무관과 현절사를 찾았지만 보수공사로 인해 구경할 수 없었고

다시 길을 따라 걷는데 길옆으로 연못이 보였다.

<지수당>이란 연못으로 건립 당시에는 정자 앞뒤로 세개의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두개의 연못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정자앞에는 연못을 건립한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었다.

 

 

 

 

조선 후기무렵에 산성으로의 이주를 추진하면서 산성을 중심으로한

백성의 수가 1천가구에 약 4천명 정도로 아주 규모가 큰 취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말 의병운동으로 인한 피해와 군청이 성밖으로 이전하면서

급격히 인구의 수도 줄어서 결국은 겨우 70여호 정도의 벽촌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정자는 한 때 경기 광주지역의 중심지였던 산성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건물일 것이다.

 

 

 

 

발걸음을 옮겨 망월사로 향했다.

망월사는 산성내에 있는 10개의 사찰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로

태조 이성계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했다. 일제때에 모두 소실되었는데

이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망월사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절 입구 샘터위에 세워져 있는 작은 불상들~

 

 

 

 

극락보전 건물~

 

 

 

 

처마끝에 달린 풍경 너머로 산성의 모습이 보였다.

 

 

 

 

대웅보전과 석탑의 모습~

 

 

 

 

이 석탑은 13층 석탑으로 2001년에 조성되었는데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탑이라고 한다.

규모가 웅장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대웅보전 뒷편에 있는 산신각~

바위 아래 공간에 지어진 특이한 모습이었다.

 

 

 

 

산신각에서 내려다 본 13층 석탑~

 

 

 

 

대웅보전 좌측에 있는 천진동자불상~

망월사를 내려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내 눈길을 끄는 이정표가 보였다.

<만해기념관>이었다. 내친김에 들러보기로 했다.

 

 

 

 

음식점들이 즐비한 길을 따라 200미터 정도 올라간 곳에 기념관이 있었다.

산성안에 만해 한용운선생의 기념관이 있는 것이 의아할뿐이었다.

이 곳과 만해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궁금증이 밀려왔다. 

 

 

 

 

기념관 앞에 세워져 있는 만해의 흉상~

안내문을 보니 만해가 말년에 머물렀던 성북동 심우장에서 시작된 기념관을

1991년 이곳 남한산성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했다.

산성이 조선시대 승려들로 조직된 승군들에 의해서 건축이 되고

또한 호국정신을 고취했던 곳이었으니, 만해 역시 승려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서 호국정신을 계승한 만큼 이 곳 남한산성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충남 홍성에 있는 만해의 생가와 기념관을 참관했던 나였지만

한번 더 둘러보고 싶었다. 입장료는 2000원이었다.

 

 

 

 

기념관 내부 전경~

 

 

 

 

만해의 곧은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안내판~

 

 

 

 

만해와 얽힌 장소들을 사진으로 소개한 안내판~

 

전시실 한켠에는 만해의 시도 시화로 만들어져 걸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과는 맞춤법이 전혀 다른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의

초판본과 여러 저서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만해의 초상~

 

 

 

회갑을 맞아 즉흥적으로 썼다는 한시도 걸려 있었다.

<총총히 지나간 예순 한 해

이것이 인간의 짧은 동안 변천이어라

세월은 비록 백발을 짧게 하나

풍상도 붉은 마음 긴 것을 어쩌지 못하네

가난을 버려두니 이미 범골 바뀐 것을 깨닫고

병을 마음대로 하니 누가 묘방 얻은 줄 알리요

물같이 흐르는 여생을 그대여 묻지마라

숲속의 매미소리 석양을 맞았노라>

--1939년7월12일 동대문밖 청량사에서--

 

 

 

 

기념관앞 뜰에 세워져 있는 불상과 청동 조각,

만해의 詩 '무제'가 적힌 시비~

 

 

 

 

기념관을 걸어 나오는데 산성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하룻동안의 길었던 산성탐방이 끝이 난 것이다.

그러나 돌아본 곳보다 돌아보지 못한 곳이 더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연주봉 옹성의 보수공사가 끝이 난뒤 한번 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문밖 느티나무에 연두빛 새순이 돋고 성벽의 돌틈 사이에서

뾰족히 새싹들이 고개를 내미는 이른 봄이나, 단풍이 불붙듯이

물들어 가는 가을 무렵이면 더 좋을 것이다.

시내버스는 다시 꼬불꼬불 산길을 이리저리 몸을 흔들면서

한참을 내려오고 있었다.

세월이 씻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묵묵히 간직하고 선 성벽의 모습이

저만치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렇게 남한산성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