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14. 08:05ㆍ여행 이야기
이른 아침 찾아간 화엄사는 전날 내린 비 탓인지 뿌연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지리산 자락을 가득 채운 안개가 화엄사를 덮고 해마저 가린 탓에 어둠조차도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안개속에 갇힌 듯 아침 7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화엄사 주변은
여전히 어두워 보였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화엄사에 도착한 것이다.
문득 마음이 설레고 발걸음조차 떨리는 기분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대나무 숲을 지나 만난 다리~
난간 귀퉁이 마다엔 사자를 닮은 듯한 네 마리의 동물이 새겨져 있었다.
산사 주변은 온통 계곡의 물소리에 묻혀 있었다.
아무런 잡음도 없이 물소리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일주문과 금강문을 지나 만난 사천왕문~
화엄사 입구엔 거대한 불사가 진행중이었고 대웅전을 향해 오르는 길 좌우로는
꽤 많은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사천왕문 뒷편의 '만월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전각~
만월당 너머로 고색창연한 화엄사의 전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엄사는 6세기 중엽인,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연기조사는 화엄경과 비구니 스님인 어머니를 모시고 지리산 자락
황둔골에 전각 두 채의 작은 절을 짓고 화엄사라 칭한 것이 이 가람의 시초였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스님들에 의해 중창을 거듭하여 신라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8가람, 81암자의
대사찰이 되었고 이때 '남방제일화엄대종찰'이란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만월당을 지나 계단을 올라선 후에 만난 보제루와 운고각~
범종각의 모습~ 종각 좌우에도 사자상이 놓여 있었다.
화엄사에는 각종 국보와 보물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보제루 앞 넓은 뜰에서 만난 '서오층석탑', 보물 제133호이다.
탑 기단과 탑신에 여러 문양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보 제132호인 '동오층석탑'~
서오층석탑에 비해 탑신과 기단에 아무런 장식이 없이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각황전을 배경으로 담아 본 두 개의 탑 전경~
보제루와 서오층석탑~
화엄사의 대표 건물인 각황전의 모습~
국보 제67호로 현존하는 목조 건물중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장육전이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후 중건하였을 때
조선 숙종임금이 각황전이란 이름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화엄사의 대웅전 모습~
각황전에 비해선 규모가 작은 아담한 모습이었다.
각황전 앞에서 내려다 본 석탑과 화엄사 전경~
각황전 앞에서 바라본 대웅전과 명부전 전경~
각황전 앞에는 또 하나의 국보가 서 있었다.
국보 제12호인 석등으로 그 규모에 놀랄 정도였는데 높이가 무려 6.4미터나 된다고 했다.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역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이라고 한다.
그 규모와 그 아름다움에 쉬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사자탑'~
보물 제300호로, 네 마리의 사자가 돌을 이고 있는 모습으로 정확히 어떤 용도로
제작되고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아마도 화엄사의 또 다른 국보인
'사사자석탑'을 본떠 제작한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각황전과 대웅전 사이의 원통전 전경~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과 보제루 사이의 길~ 돌 위에 새겨진 문양이 아름답다.
대웅전 앞에서 다시 바라본 각황전~
화엄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 300여명을 조직해 왜군에 맞서 싸웠는데
그 보복으로 왜장 '가등청정'에 의해 화엄사가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화엄사의 건물은 석물을 제외하곤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복원되거나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대웅전을 지나 구층암으로 향했다.
구층암으로 오르는 길은 대웅전 뒷편으로 이어지는 자갈길을 따라가는 것과
계곡을 따라 오르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계곡을 따라 오르는 것이 훨씬
운치가 느껴지는 길이었다. 대나무 숲을 헤치고 작은 징검다리도 건너다보니
그야말로 비로소 절간에 온듯한 운치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구층암을 처음 접하는 순간, 절이라는 느낌보다는 민속촌의 양반집을 만난 느낌이었다.
기둥엔 단청을 칠한 흔적이 없이 소박하고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구층암의 명물인 모과나무 기둥~
전혀 다듬지 않은 원래의 나무 모습 그대로 기둥을 쓴 것으로, 뜰에 자라던
죽은 모과나무를 그대로 승방의 기둥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동쪽에 자라던 모과나무는 동쪽 승방의 기둥으로, 서쪽에 자라던 모과나무는
서쪽 승방의 기둥으로 받쳐져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특이하고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구층암 주변엔 꽃무릇이 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무릇은 스님들이 겨울 양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하며, 하지만 그닥 맛은
없었나보다. 아무 맛도 없다고 스님이 표현하신 것을 보면~
구층암은 천불이 모셔져 있는 천불보전이나 마당의 석탑이 아니라면
한적한 시골집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었다.
< 구층암에선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자신을 낮춰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 전부입니다.
그러다 구층암 야생차밭에서 구한 차 한 잔 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화엄사 안내 책자에서 옮김--
구층암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화엄사의 전경~
우뚝 솟아있는 각황전의 지붕이 보인다.
대웅전과 돌담길~
잠시 시골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웅전 앞에서 내려다 본 화엄사 전경~
각황전을 지나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계단이 이어져 있었는데 108계단이라고 했다.
드디어 만난 국보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
석탑 앞에는 또 다른 석물이 놓여져 있었다.
이 석탑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심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석탑 앞의 석물은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고 있는 연기조사의 모습이며,
석탑 중앙에 합장하고 서 있는 형상의 불상은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한다.
입을 벌린채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는 인생의
희노애락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바라본 대웅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절이었다.
각황전 앞에서 내려다본 여러 전각들의 모습~
보제루와 종각~ 보제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 또한 볼거리였다.
역시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굽은 모양 그대로 설렁설렁 다듬어 쓴 것으로,
옛 사람들의 건축적 해학이 묻어나는 건물이었다.
보제루 앞에서 다시 바라본 대웅전~
마침 안개와 구름이 걷히면서 파란 하늘과 햇살이 화엄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다시 찍어본 '서오층석탑'~
그리고 '동오층석탑'~
범종각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경내엔 배롱나무가 막바지 꽃을 피우고 있었다.
< 벽암국일도대선사비 >~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선사를 기리는 비라고 한다.
< 지리산화엄사 >라고 새겨진 일주문의 현판~
그 이름만큼이나 웅장함과 수려함을 모두 갖춘 사찰이었다.
사찰을 돌아보는 내내 어느 한 곳이라도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없을 만큼
천년의 향취가 곳곳에 배어있는 가람중의 가람이었다.
< 화엄사는 마치 지리산에 숨어있는 보물창고 같은 절입니다.
나라에서 정한 문화재들이 곳곳에 숨어있고 보물보다 더 아름다운
보물들이 워낙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엄사는 한 번에 다 담아갈 수 없는 절입니다. >
---화엄사 안내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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