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영원한 제국을 향한 꿈이 서린 곳... 수원 화성에서~!

2012. 9. 22. 08:03여행 이야기

 

 

올해는 아무래도 날씨 운이 없나보다.

구리에서 출발할 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가을 하늘이었는데 수원엘 도착하니

하늘은 온통 구름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눈부신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화성을 둘러보고 싶었던 바램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화성을 돌아보는 동안 소나기까지 만났으니......

하지만 먼길을 왔으니 그냥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 그냥 둘러보기로 했다.

 

 

 

장안문에서 부터 출발해 보기로 했다.

화성의 둘레는 약 5.7km로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천천히 걷는다면

족히 두 세 시간은 걸릴 거리였다.

 

 

 

화성의 4개의 성문 중 장안문은 북문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 사진은 성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장안문 옆 < 북동적대 >위에서 만난 대포~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이라고 한다.

 

 

 

화성의 성곽 높이는 4~6m로, 실학자 유형원과 정약용이 설계하고

2년 9개월의 공사 끝에 완공한 성이라고 한다.

 

 

 

 

장안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꽤 근사한 건물들이 보였다.

 

 

 

 

 

바로 화성에서 가장 멋진 건물에 해당하는 화홍문이었다.

 

 

 

 

 

화홍문은 화성을 가로지르는 수원천의 북쪽 수문의 이름으로,

냇물이 수문을 통과하면서 일으키는 물보라를 무지개에 비유하여

화홍문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수로엔 쇠창살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입을 차단하였다고 하며

남수문도 최근에 복원 되었다고 한다.

 

 

 

 

화홍문을 지나 성밖에서 만난 < 방화수류정 >의 풍경~

 

 

 

 

 

화홍문을 건너 오르막이 시작되는 언덕 위에 다소곳이 세워져 있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의 모습~

주변 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과 주변 경치와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도

함께 수행하는 건물로, <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 >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방화수류정 아래 북암문을 지나 바라본 < 동북포루 >~

 

 

 

 

 

동북포루는 초소나 군사대기소 같은 기능을 하는 건물이라고 한다.

5개의 포루중 하나라고 한다.

 

 

 

 

국궁 체험장 너머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건물 하나~

< 동북공심돈 >이었다.

 

 

 

 

연무대로도 불리는 < 동장대 > 전경~

이곳 동장대는 군사를 지휘하던 지휘소 역할과 함께 훈련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공심돈은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이라고 한다.

유사시엔 적을 향해 무기를 발사할 수 있도록 벽을 따라 혈석이 뚫려져 있었다.

 

 

 

 

동북공심돈의 혈석으로 내려다 본 창룡문의 모습~

 

 

 

 

 

< 동북노대 >의 모습~ 노대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해 지은 건물로

화성엔 2기의 노대가 있다고 한다.

 

 

 

 

화성의 동문에 해당하는 < 창룡문 > 전경~

6.25 전쟁 당시 무너진 것을 1976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성문 밖에서 바라본 창룡문의 모습~

적의 침입 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이 성문을 둘러싸고 있는 특이한 형태였다.

 

 

 

 

창룡문을 지나 계속 성곽을 따라 걸었다.

 

 

 

 

 

이 구조물은 봉화대 역할을 하는 < 봉돈 >으로 비상상태를 알리는

통신시설중 하나라고 한다. 내부엔 무기고와 봉돈을 관리하는 군졸이

기거할 수 있는 온돌방도 만들어져 있었다.

 

 

 

< 동남각루 >의 모습~ 지나온 뒤에 바라본 모습이다.

이 동남각루를 내려오니 최근에 복원된 남수문이 있고 그리고 성벽이 끊겨 있었다.

그리고 팔달시장과 한창 보수공사중인 팔달문이 나타났는데 잠시 방향을 몰라 헤매일 수 밖에 없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골목을 들어서자, 다시 성벽을 따라 오르는 긴 계단을 만날 수 있었다.

 

 

 

 

오르막을 다 오른 곳에서 만난 < 서남암문 >~

암문 위에는 포사가 설치되어 있었다.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낸 출입구를 말하는데, 화성엔 5개의 암문이 있다고 한다.

 

 

 

 

암문을 지나자, 길게 뻗은 성곽이 나타나고 끝에 건물이 하나 보였다. < 서남각루 >였다.

군사지휘소와 주변 감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용도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암문 밖에서 바라본 서남암문~

다른 암문과 다르게 성 위에 포사가 지어져 있는 특이한 형태라고 한다.

 

 

 

 

화성 성곽의 모습~ 모양과 크기가 다른 각각의 돌을 공간에 맞게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올린 형태였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서포루와 효원의종을 지나자 드디어 서장대가 바라 보였다.

 

 

 

 

 

팔달산 정상에 설치한 서장대는 사방 백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성 주변을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라고 한다.

 

 

 

 

정조임금이 사도세자의 릉인 융릉을 참배하고 이곳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 훈련과 야간 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고 한다.

그 모양이 늠름하고도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서장대 뒷편엔 < 서노대 >가 세워져 있었다.

역시 동북노대와 마찬가지로 쇠뇌를 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라 한다.

 

 

 

 

서장대 앞에서 내려다 본 화성 행궁의 전경~

건립 당시엔 600여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행궁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을 1996년 부터 복원한 것이라 한다.

 

 

 

서장대에 걸려 있는 < 화성장대 >란 현판은 정조임금이 친히 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서장대를 돌아보고 있는 동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지나가는 여우비가 아닐까 했지만 제법 굵은 빗방울을 뿌려 대기 시작하고 있었다.

결국 이 서장대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1시간여를 꼼짝 못하고 말았다.

 

 

 

 

비가 그치고 잠시 햇살이 화성을 비추고 있었다.

얼른 발길을 옮겨 화서문으로 향했다. 화서문 옆엔 서북공심돈이 우뚝 서 있었다.

 

 

 

 

< 서북공심돈 >과 < 화서문 > 전경~

화서문은 화성의 서문에 해당한다고 한다.

 

 

 

 

성곽 아래에서 바라본 < 서북각루 >의 모습~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피고 유사시 공격할 수도 있는 일종의 망루 같은 건물로,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이 건물이 완공 된 뒤 화성을 방문한 정조임금은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라고 하며

무척 만족스러워 하였다고 한다.

 

 

 

성안에서 바라본 화서문 전경~

정조임금은 이곳 수원에 화성을 짓고 임금 직속의 장용영 군사 만여명을 훈련 시켰다고 한다.

화성은 백성들의 부역이나 남한산성 축조시 처럼 승려들을 동원해서 축성한 것이 아니라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일꾼들이 엄청나게 몰려 들어 공사를 차질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조임금은 왜 이곳에 화성을 건설한 것일까?

개혁을 꿈꾸었던 정조임금에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원한 제국'이란 소설에는 정조임금의 화성 건설에 관한 꿈을 이야기한 부분이 있었다.

효심이 뛰어났던 정조임금은 개혁과 더불어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 또한

계획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자가 자라 성인이 되면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뒤

이곳 화성으로 내려와 새로운 세상을 열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화성에서 군사를 훈련시킨 목적도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상왕으로 물러난 뒤

이곳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쳐들어 가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정조임금의 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권력을 장악한 뒤에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 노론을 모두 처단하고 조선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개혁하는 것이 정조임금의 오랜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전에 정조임금은 숨을 거두고 만다.

 

 

 

정조임금의 죽음에 대해선 후세에 독살설에 무게가 실리기도 한 적이 있었다.

죽음이 비교적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탓에 정적들로 부터 독살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또 다른 설로는 정조임금의 수원 축성과 군사 훈련에

위기를 느낀 청나라가 독살을 사주했다는 것이었다.

 

 

 

장안문 전경~

 

만약 정조임금이 그런 꿈을 실제 꾸었고 더 오래 살아서 그 꿈을 이루었다면

조선은 어쩌면 그렇게 허망하게 일본에 의해서 패망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도정치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던 사대부도 사라지고 백성들이 신분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누구나 노력하면 잘 살 수 있었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커다란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을 꿈이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개혁을 꿈꾸고 진실로 백성을 위하고자 했던 현명한 군주였던 정조임금...!

인재를 키우고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을 이끌었으며  당파 싸움으로 찌든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정조임금...!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비록 꿈을 이루진 못했더라도

다만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후하게 평하는 것에 위안을 삼지는 않을까??

 

다시 한바탕 비가 지나고 화성 위로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수원 화성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