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비극...... 덕혜옹주의 묘소를 찾아보고~!

2013. 4. 10. 09:35박물관.문화재

 

 

몇 년 전,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삶을 기록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덕혜옹주가 새롭게 세간의 관심사가 된적이 있었습니다.

덕혜옹주가 마지막 여생을 보냈던 창덕궁 낙선재 일원의 수강재엔

그녀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덕혜옹주가 묻힌 남양주 홍릉 뒷편의

묘소에도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덕혜옹주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지난 주말 늦은 오후, 3년 전 들러 보았던 덕혜옹주의 묘소를 다시 찾아 보았습니다.

아직 봄빛보다는 겨울빛이 더 짙게 드리운 길을 천천히 걸어 묘소로 향했습니다.

 

 

 

덕혜옹주의 묘소를 안내하는 이정표는 없습니다.

입구에 이렇듯 작은 안내판이 있을 뿐입니다.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의 능이 있는 홍.유릉 뒷편의 길이 덕혜옹주 묘소로

향하는 길입니다. 좌측의 벽이 홍.유릉의 능역입니다.

 

 

 

 

이 길은 지역 주민들이 휴식의 공간으로, 운동의 공간으로

이용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제비꽃만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방문객을 맞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만나는 재실... < 영 원 >의 재실입니다.

영 원은 고종의 세째 아들 '의민황태자'와 그의 비(妃) '이방자'여사의 묘소입니다.

우리에겐 '영친왕'으로 더 많이 불리워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엔 왕실의 묘를 부르는 명칭이 달랐는데,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나 그 비의 무덤을 원(園)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황태자 자리에만 머물렀던 영친왕의 묘소엔

'능'이라는 호칭이 아닌 '원'이라는 호칭이 붙은 듯 합니다.

 

 

 

 

영 원의 홍살문과 정자각의 모습입니다.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서 울타리 너머로 찍어 본 모습입니다.

 

 

 

 

정자각은 왕릉에 비해서 규모가 작은 편이었습니다.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의민황태자는 후사가 없던 이복 형, 순종의 대를 이을

황태자로 봉해진 뒤 11살에 일본으로 끌려가서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군으로

근무하다가 1961년에야 귀국, 그리고 1970년 향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 가 두려움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평생을 살았을 의민황태자...

죽어서야 겨우 아버지 가까이에 묻힌 채 그 그리움을 달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다시 덕혜옹주 묘소로 향하는 길~

 

 

 

 

 

천천히 걷는 내 옆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3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땐 덕혜옹주의 묘소임을 알리는 플랜카드도 붙어 있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알고 찾아오지 않는다면 묘소를 찾기가 어려울 것 같더군요.

 

 

 

 

철책 울타리 너머로 드디어 덕혜옹주의 묘소가 보였습니다.

아담하고 소박해 보이는 묘소에 비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화려한 모양의

석등 하나가 묘소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 대한 덕혜옹주지묘 >라는 비석이 보입니다.

나는 소설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덕혜옹주의 쓸쓸하고도 비극적인 삶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는 편입니다.

그녀의 불행은 그녀가 망국으로 치닫고 있던 조선의 황녀로 태어나면서 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의지로도 바꿀 수 없었던 비운의 운명을 가진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을까요......!

폭포같은 슬픔과 바위같은 그리움을 한평생 가슴에 품고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이 되던 해에 태어난 고명딸이라고 합니다.

늦게 얻은 딸이어서 고종이 애지중지 옹주를 키웠다고 합니다.

그녀의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아마 이때가 전부였을 것입니다.

고종이 승하하셨을 때 옹주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는데 이후로

일제에 의해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덕혜옹주 역시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죽어서야 겨우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움이 지척에 있는 홍릉의 담장을 타고 넘기엔 그녀의 한이 너무 지쳐버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묘소 앞엔 소나무 한 그루만 무심히 서 있었습니다.

 

함께 화제가 되었던 그녀의 남편 '소 다케유키'도 또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그 역시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에서 몰락한 하위 귀족이나 다름 없었던 대마도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일본 왕실의 강요에 의해 덕혜옹주와 정략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덕혜옹주가 피지배자의 굴레 속에서의 피해자였다면 그녀의 남편은

지배자의 굴레 속에서의 피해자였을 것입니다.

울타리 너머로 잠시동안 묘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우리 역사의 부끄럽고도 수치스러웠던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황녀라는 신분만으로 꽃다운 시절과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덕혜옹주...

그녀를 추모하는 마음을 울타리 너머로 날려보내고 묘지를 떠나왔습니다.

 

이제는 편히 쉬세요.......!

 

 

 

 

그리고 덕혜옹주의 무덤과 직선거리로 100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에

또 다른 왕가의 무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의친왕의 무덤으로,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 '이석'의 아버지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생전에 스무 명이 넘는 많은 자식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요즘 들어

그의 행적들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으며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했다가 발각되어

실패한 뒤 부터는 일제의 감시에 시달렸고, 독립운동가들과도 꾸준히 교류했던

흔적들이 차츰 드러나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망국의 왕자였지만 끝까지 그 품위와 기개를 잃지 않았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의친왕께서도 이제 그 모든 시름 내려놓고 편히 잠드소서......!!!

 

 

 

 

덕혜옹주의 묘소를 돌아 나온 뒤, 홍.유릉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홍릉은, 고종임금과 그의 비(妃) 명성황후를 합장한 능이며

유릉은 순종임금과 그의 두 황후를 합장한 능입니다.

 

 

 

 

덕혜옹주의 아버지, 고종임금이 묻혀 있는 홍릉의 입구입니다.

능의 규모와 석물의 위치가 조선의 다른 왕릉들과 확연히 차이가 있어 보였습니다.

다른 왕릉에서는 석물이 무덤 앞을 지키고 서있는 것에 반해 홍릉과 유릉에서는

침전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이 다른 특징이었습니다.

 

 

 

 

이렇게 능의 모습이 다른 것은 고종임금이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왕릉도 황제릉으로 조영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능을 본 떠 조영하였다고 하였는데, 다른 왕릉에서는 침전도

제후국의 격식을 갖춰 정자각으로 지어져 있지만 홍.유릉에선 일자각 형태의 침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홍릉 앞의 석물들입니다.

문무인석과 여러가지 동물들의 석상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동물 석상은,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서대로 서있다고 하네요.

 

 

 

 

 

비교적 근대에 조성된 왕릉이다보니 석물들의 모양이 아직도 정교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편입니다. 금방이라도 살아서 뛰어 다닐 것 처럼 생생해 보이기 까지 합니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모양과 문양도 굉장히 사실적이고 정교한 편이었습니다.

아마도 백 년 정도의 세월은 석물에 역사의 흔적을 남기기엔 부족한 시간인가 봅니다.

 

 

 

 

순종임금의 능인 유릉의 석물들은 홍릉에 비해 훨씬 더 중후하고 정교하며

그 모양도 아름답고 표현도 훨씬 사실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역사의 공간속에 와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예술 작품을 보는 듯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고종임금의 능인 홍릉의 모습입니다.

 

열두살에 왕위에 올라 재위 기간동안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 간의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왕노릇 하기가 힘들었을 유약한 임금이었던 고종은,

그러나 밀려드는 외세의 침략속에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 어느 임금보다도 힘들고 괴로운, 격랑의 재위 기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만약 역사가 그에게 망국의 책임을 묻는 굴레를 씌운다면 그 역시도 억울함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 흘러간 역사는 다만 그 교훈으로만 삼을 일일 것입니다......!

 

 

 

 

 

지난 해 말에 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던 덕혜옹주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다녀 온적이 있었습니다.

잊혀져 가던 덕혜옹주의 비극을 다시 되새겨 보게 하는

뜻깊은 기념전이었습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합니다.

덕혜옹주의 일생을 한 여인의 인생사라고 치부하기엔

그 인생사에 덧붙여진 역사의 굴레와 부피가 너무 커 보입니다.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놓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교훈이자, 책임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게 덕혜옹주의 묘소를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