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보원사지>에서~!

2021. 11. 11. 06:46박물관.문화재


서산 개심사에 들렀다가 마침 가까운 곳에 있는
국보 84호 마애여래삼존상보원사지를 함께 둘러보고 왔습니다.
단풍 속을 걸어서 만나거나 또는 단풍과 어우러진 문화재를
만나는 즐거움이 가득했던 어느 날의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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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스러운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국보 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의 모습입니다.
햇살을 받으면 더욱 더 선명히 드러나는 미소 띤 얼굴로 유명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였습니다.



마침 햇살이 삼존상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삼존상 너머로 단풍이 물들고 있는 산자락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마애여래삼존상을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삼존상은 중앙의 불상이 <석가여래입상>, 좌측이 <제화갈라보살입상>
우측이 <미륵반가사유상>이라고 합니다.
제화갈라보살은, 석가에게 장차 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던 보살로,
불교에서는 과거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우측의 미륵반가사유상은 미래에 다가올 부처를 의미한다고 하므로,
삼존상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불을 표현한 양식이라고 합니다.



석가여래입상의 모습입니다.
석가여래입상의 높이는 2m80cm라고 합니다.
마애불은 절벽의 암벽이나 거대한 바위면에 불교의 주제나
내용을 조각으로 형상화한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꽃잎이 피어나듯, 한창 삼존상의
미소가 피어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더욱 더 가깝게 찍어본 모습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자애로운, 온화하면서도 친근감이 듬뿍 느껴지는,
더불어 천진스러움과 순수함까지 엿보이는 마애불의 미소였습니다.
방긋 웃는 아기의 얼굴을 보는 듯도 합니다.



좌측의 제화갈라입상의 모습입니다.
삼존상은, 우리나라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자연적으로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커다란 암벽을 비스듬히 파낸 뒤
마애불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천 년이 훨씬 넘는 세월에도 백제의 미소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비결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측의 미륵반가사유상의 모습입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58년 문화재 현장 조사를 하던 중, 지나가던 한 나뭇꾼이
'인바위'라는 곳에, 옛날 힘이 센 장사가 부처님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가보니 깊은 산중에 마애여래삼존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발견 당시에는 현재 사람들이 관람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으며
커다란 바위의 중간에 새겨져 있어서 맞은 편 산중턱에서만 마애불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마애불의 보존을 위해 축대를 쌓고 비바람을 피하기 위한
집을 지어 관리해 오다가, 원래의 백제의 미소를 되찾아 주기 위해
2007년 철거하였다고 합니다.



마애여래삼존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현지 주민들은
삼존상을 산신령으로 여기며 숭배했다고 합니다.
그 후 국보로 지정되고 문화재로 관리가 되면서, 현지 주민들을 위해
맞은 편 산중턱에 산신각을 지어 그 신앙을 달랬다고 합니다.



옆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미소가 한층 더 도드라지며 살짝 장난끼 가득한 아이의 얼굴을
엿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마애여래삼존상의 모습을 가장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시기는
여러번 탐방해본 결과, 해마다 4월에서 9월 정도가 가장 적합한
시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10월에서 이듬해 3월 까지는 해가 낮게 걸리면서 맞은 편 산자락의
나뭇가지에 가려 삼존상 위로 그늘을 드리우는 편이었습니다.
시간은 11시에서 12시 사이가 가장 적당한 편이었는데, 태양이
나뭇가지 위로 드러나 하늘에 떠있는 시간이어서 햇살이 오롯이
삼존상을 비추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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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삼존상을 돌아본 후, 계곡을 따라 약 1.5km 거리에
위치한 보원사지도 함께 들러 봤습니다.

보원사는 백제시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융성했던 사찰이라고 합니다.
주변에 100개의 암자와 1000여 명 정도의 승려를 거느린
대사찰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옛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오층석탑 하나만 넓은 터 위에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보원사지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당간지주의 모습입니다.
당간은 절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위엄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쫒는 의미인 당(幢)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를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세워놓은 구조물을 당간지주라 부른다고 합니다.



보원사지 당간지주는 현재 보물 제 10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4.2m라고 합니다.
보원사지엔 총 5개의 보물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당간지주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석조의 모습입니다.
석조는 화강암의 돌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 쓰던
용기라고 합니다.
안쪽과 윗쪽은 정교하게 다듬었으나 바깥쪽은 거칠게 다듬은
것으로 봐서, 땅에 묻어두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보물 제10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석조들 중에서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멀리 가을 단풍을 배경으로 서있는 오층석탑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오층석탑의 모습을 더 가깝게 찍어본 모습입니다.
매끈하면서도 안정적으로 보이는 탑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드디어. 가까운 곳에서 오층석탑을 마주했습니다.
보물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의
전형적인 석탑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안내판에는, '전체적으로 미려하고 경쾌하며 안정감이 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래 기단부의 한쪽 면을 찍어본 것입니다.
좌측이 건달파, 우측이 야차로 보였습니다.
건달파는 머리에 사자관을 쓰고 하프를 연주하는 모습이며
음악을 좋아하는 중으로, 우리나라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건달이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야차는 나무의 신이자 지하의 광물을 지키는 신이라고 합니다.



석탑 뒷편엔 부도탑과 비석이 자리잡고 있더군요.



보물 제105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입니다.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부도탑으로, 법인국사는 고려 광종 때
국사를 지낸 승려로, 이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는데 광종의 지시로
이 부도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보물 제106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입니다.
고려 경종의 지시로 세워졌으며, 법인국사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탄문이었다고 합니다.
역대 왕들과 가까웠으며 국가의 불사를 도맡아 시행했다고 합니다.
특히 고려 광종과는 매우 가까웠는데 왕권강화 기간 이후
정신적인 지주로서 왕사, 국사로 가까이 머물게 했으며
입적하자 무척이나 슬퍼하였다고 합니다.



오층석탑 뒷편에 자리한 금당 터의 모습입니다.



뒷편에서 바라본 보원사지의 전경입니다.
주변이 산들은 한창 가을이 물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발굴 당시 출토된 유구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모습입니다.
정확한 폐사 연대를 알지 못한 채 긴 잠에 빠져있던 보원사지가
발굴작업을 통해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수많은 유구들의 모습으로 보아, 꽤 큰 규모의 사찰이
존재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철불의 모습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보물이나 국보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규모가 꽤 큰 철불이었습니다.







이렇게, 서산 보원사지를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