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13. 08:12ㆍ추억 이야기
녀석은 내가 스무 살 시절 부산에 있는
어느 합판회사를 다닐 무렵 입사 동기였었다.
서로 부서가 달랐던 녀석과 내가 다시 만난 것은
기숙사에서 였는데 우연히도 같은 방을 쓰게 된 것이었다.
나이가 같았던 우리는 단박에 친구가 되었고
어딜 가든 꼭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녀석은 내 손을 잡고 걷는 것을 좋아했는데,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이었던 나에 비해서 살짝 통통한 체격에
나보다 키가 작으면서 머리가 길었던 녀석과 함께 손을 잡고
걷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은 꼭 연인이 함께 걷고 있는 것
같다며 놀리곤 했었다.
녀석은 요즘으로 치자면 꽃미남에 가까우리만치 잘생긴
외모여서 회사 여직원들에게 인기도 많은 편이었었다.
눈이 크고 활짝 웃는 모습은 어찌나 맑고 보기 좋았는지...
그런 녀석이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던 모양이었다.
녀석과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여직원으로 당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던 산업체근로학생이었는데,
아담한 키와 이쁘장한 얼굴에 긴 생머리를 하고 있던 여학생이었다.
그러나 녀석의 구애를 그녀는 무심히 받아 넘겼던 모양이다.
녀석의 사랑이 지독한 짝사랑이었다는 것을 나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
그녀의 친구들 얘기로는 그때 그녀는 학교의 수학선생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중이라 녀석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녀석의 가슴앓이가 계속 되었고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는 동안 계절은 흘러서 다시금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날 드디어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일요일 오후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 회사를 찾았던 나는 마침 하루종일
바다낚시를 즐기고 돌아오던 녀석과 마주친 것이었다.
적당한 술기운이 오른 듯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면서
덥썩 나를 끌어 안았다.
함께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문득
녀석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보니 그녀였다. 그녀도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나온 것이었다.
잠시 녀석의 시선속에 있던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식당 문을 나서고 있었다.
술기운이 녀석의 마음을 충동질한 것일까...
아니면 용기를 불러 일으킨 것일까...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녀석이 나에게 부탁을 했다.
그녀와 꼭 한 번만 이야길 나누고 싶다며
학생기숙사로 가서 그녀를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 그녀는 기숙사에 없었다.
녀석은 어떤 직감이 떠올랐는지 바닷가로 나가보자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썰물이 까마득히 밀려나간 다대포 해수욕장의
백사장 한가운데에 그녀가 있었다.
어슴프레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배경 삼아
친구와 함께 뛰어 놀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녀석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나는 백사장 가장자리 길을 따라 걸으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잠깐 멈칫하는 듯 하더니
그녀가 빠르게 녀석을 지나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망연히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성이고 있는 녀석의 모습도 보였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내가 다시 녀석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 갑자기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곤 내 시야에서 녀석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다시 녀석의 모습을 찾은 것은 놀랍게도 싸움판의
한가운데에서 였다.
내가 천천히 바닷가를 걸어서 다시 회사를 향해 걸어오는데
내 얼굴을 알아본 어떤 회사 사람이 달려오더니
지금 녀석이 싸움이 벌어져서 난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내가 달려가보니 버스 종점 부근에서
그야말로 난장판이 벌어져 있었다.
싸움판은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녀석의 모습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겨우 종점의 한 귀퉁이에서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녀석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녀석의 얼굴은 이미 코피로 얼룩진 뒤였다.
내가 그 속으로 뛰어 들어 녀석을 싸움판에서 끌어 냈을 때
녀석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얼른 녀석을 일으켜 세우고 바닷가로 데려가
바닷물로 얼굴을 씻겼다.
그리고 기숙사까지 걸어오는 동안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녀석은 담담히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녀를 향해 바닷가로 걸어 갔을 때 그녀에게
이야길 나눌 수 없느냐고 묻자, 그녀는 차갑게
싫다고 대답을 하며 녀석을 지나쳤다고 한다.
창피함과 허탈감이 뒤섞인 마음으로 망연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저만치서 걸어가던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순간 녀석은 이성을 잃었고 그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회사 근처 버스 종점 부근에서 그녀를 따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버스 종점 부근은 회사 사람들을 상대로 술을 팔던
상점들이 늘어서 있기도 했는데 휴일이면 섬으로
낚시를 다녀오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주로 술판을 벌이는
곳이기도 했다.
녀석이 그녀를 불러 세우고 잠시 이야길 나누자며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마침 주변에선 단체로 낚시를 다녀온 뒤
거하게 술판을 벌이던 스무 명 내외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곧 녀석과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 들었고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일행중 한 사람이 그녀에게 녀석을 가리키며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고 그녀는 큰소리로
'몰라요,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소리쳤다고 했다.
그러자, 그중 어떤 사람이 건방지다며 그녀에게
손찌검을 하려 했고 그걸 막아서며 나무라는 녀석의 얼굴로
어디선지 모르게 주먹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녀석의 코에선 코피가 흘렀고 태권도로 단련된 녀석의
주먹과 발이 그 사람들을 향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싸움이 벌어지자, 마침 주변 상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회사 사람들이 녀석을 돕기위해 그 싸움판에 뛰어 들었고
순식간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내가 달려왔을 때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싸움판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녀석은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그후 꽤 오랫동안 회사에 남아 있었는데
그로부터 일 년 정도가 지난 뒤 비로소 녀석의 사랑이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그때 일을 진심으로 미안해 하며 녀석을 그리워한다는
이야기가 내게 전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녀석에게 그녀는 여전히 상처보다는
사랑했던 여자로 기억되어 있었다.
그후로 오랫동안 녀석과 마주하는 술자리에선
어김없이 그녀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고
여전히 그녀의 안부를 궁금해 하며 행복하길
바라고 있었다.
갓 세상을 알아가던 스무 살 시절에 순수와 낭만이
가득했던 추억을 고스란히 공유했던 녀석......
짝사랑했던 여자를 위해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향해
싸움판을 벌이기도 했던 녀석......
그것이 용기였다기 보다는 그조차도 어린 시절의
때묻지 않은 순수였을 것이다.
그때 녀석과 함께 나누었던 추억은 아직도 내게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소중한 추억들을 되새기며 오랫동안 친구로
늘 곁에 있어주기를 바랬는데 녀석은 지난 해 초에
그만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늘 이렇게 추억 한 토막을 꺼내어 글로 옮기는 것은
녀석에 대한 내 그리움이다.
오래 내 곁에 있어주지 않은 야속함인 것이다......
*옛 앨범속에는 마침 녀석과 내가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남아있었다.
녀석과 내가 서있는 곳이 바로 추억의 장소인
다대포 해수욕장의 백사장이다.
마침 썰물로 훤히 드러난 백사장이 보이고 뒷편에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몰운대도 보인다.
당시엔 군사지역이라 출입이 통제 되어 있었다.
사진에 찍힌 날자로 봐선 내가 군입대를 위해
회사를 그만 둔 바로 다음날 그런 나를 마중하기 위해
찾아와 준 녀석과 기념 사진을 남긴 것으로 기억한다.
<유득현>... 녀석의 이름이다.
내겐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상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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